새로운 넓이 : New area
머리말
우리가 착각하는 것 중 하나는, 넓이가 있을 때 깊이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언가를 더 많이 배우려고 다양한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싶어 한다.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 학원, 태권도 학원, 속셈학원, 컴퓨터학원을 다닌 우리들의 잠재적 의식 속에는 많은 것을 잘해야 깊이도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임을 알 수 있다. 땅을 파본 적이 있는가?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경험했을 일이다. 그때 느끼는 것은 깊게 팔 때 넓어지는 것이지, 넓게만 파서는 결코 깊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오늘 새로운 넓이에 대해서 나누고자 한다. 소논문과 구약 주석에서 밝히는 왕대일 교수님의 생각은 넓이에서 깊이의 패러다임의 전환이었다면, 나는 넓이에서 깊이를 넘은 <새로운 넓이>를 말하고자 한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얕은 넓이가 아니다. 깊이를 <넘은> 새로운 넓이인 것이다. 몸말에서는 왕대일 교수님의 넓이의 해석에서 깊이의 해석을 알아보고 더 나아가 <새로운 넓이>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이번 수업과 리포트를 통해 우리의 새로운 area가 생기기를 소망한다.
몸 말
1. 사실이냐? 진실이냐?
이 물음은 성경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질문이었다. 지금까지는 성경이 사실이냐 아니냐는 측면에서 탐구되어왔다. 성경이 사실임을 증명하기 위한 끊임없는 시도들이 계속되어왔다. 사실임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들은 성경을 들어야 할 <진리>의 대상이기보다는 탐구해야 할 <연구>의 대상으로 만들었고, 오류가 하나 둘 밝혀질수록 성경의 권위는 떨어져만 갔다. 이것이 성경을 사실로 만들어갈 때 생기는 심각한 오류이다. 넓이와 깊이, 통시와 공시적 해석을 말하기에 앞서 사실과 진실을 언급한 것은 그만큼 이 작업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먼저 성경은 사실을 모아놓은 역사서가 아니라 사실을 근거로 한 진실임을 말하고 싶다. 우리의 관심이 사실에만 집중되어 큰 진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실에만 집중했을 때 얼마나 모순과 해체가 일어났는지 역사를 통해 익히 알고 있다. 성경책을 시대 순으로 작성해놓은 완벽한 역사책이라고 가정하면 너무나도 많은 모순들에 당황하고 한다. 하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그분의 뜻(진실)을 인간의 언어로 성육신(incarnation)한 진실로 볼 때, 이 말씀은 오늘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역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에만 매여 있는 것이 아닌 진실로 가는 위대한 발걸음을 함께 떼길 바란다.
2. 번역은 반역?
사실과 진실의 문제에 이어 우리가 또 하나 새롭게 알아야 할 것이 있다. 흔히 우리는 최초의 원 자료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참 진리와 뜻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성서학자들은 원어를 공부하고 조금 더 진짜의 뜻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번역을 통해 변질(?)된 우리의 성경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찾기 어렵다는 말이 된다. 번역을 하게 되면 반역과 같은 왜곡이 일어난다는 주장이다. 정말 그럴까? 이에 대해 왕대일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성서해석학의 어려움을 역본으로 읽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데서 찾는다면,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본 토대를 크게 훼손하는 짓에 지나지 않는다. 성서 번역에는 인카네이션(incarnation)의 정신이 아로새겨져 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번역되지 않았다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독생자의 영광을”(요 1:14b) 우리는 결코 볼 수가 없었다. 이에 대해 렌토르프는 이렇게 말한다.
최종 저자들은, 우리가 그들을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간에, 어쨌든 우리가 그럴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본문의 원래적 의미에 가까이 다가서 있다. 그들이야말로 우리가 처음 반드시 들어야 할 목소리와 메시지를 지닌 자들이다.
위 두 입장에 적극 동감하는 바이다. 요즘 표준새번역과 우리말 성경 등, 여러 번역본들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이런 흐름과는 다르게 오직 개정개역본만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NIV나 NASB가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KJV만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성경이 사람의 글말로 기록되어 있다는 문학적, 사회적, 역사적, 종교적 현실만 강조할 뿐, 또는 현재 우리가 읽는 성경은 원본이 아니라 사본이거나 번역본이라는 해석상의 한계만 주장할 뿐, 성경 본문에 사람의 글말로밖에 표현될 수 없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숨 쉬고 있다는 신비한 차원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고 말았다. 우리는 사실과 진실에 이어 한 가지를 더 생각해야 한다. 바로 번역은 반역이 아닌 성육신(incarnation)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넓이의 해석과 깊이의 해석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3. 더 넓게, 더 넓게_ 통시적 관점
역사비평이나 역사비평적 해석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 개신교가 주도해온 성서 해석이다. 본격적인 역사비평적 해석은 19세기 말 독일 루터교 목사의 아들 벨하우젠과 함께 시작된다. 그의 책 『이스라엘 역사의 서문』이 성서를 역사비평적으로 재구성한 최초의 본격적인 작업이기 때문이다. 벨하우젠을 시작으로 하여 역사비평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본문 비평에서 편집 비평에 이르는 성서 해석의 방법론들이 그 활발함을 보여준다. 이들은 텍스트 배후에 있는 역사를 알아야 본문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접근을 통시적 관찰이라고 한다. 현재 주어진 최종 형태의 본문에서부터 시간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원본이나 최초 본문의 형태를 추적하거나 재구성하는 노력이다. 그러다 보니 텍스트는 텍스트 배후에 있는 역사를 보여주는 창문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성경에 수록된 이야기와 가르침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였던 사람들에게 역사비평의 이 같은 태도는 “성경의 죽음”이라고도 부를 정도로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처럼 역사비평적 해석이란 순수하게 넓이의 해석이다. 본문의 세계를 파악하기 위해서 문헌층도 들여다보고, 언어적 표현 양식이나 형식도 살펴보고, 언어의 쓰임새를 전통이나 전승의 시각에서 추적도 해보고, 여러 문헌이나 전승이 어떻게 해서 하나의 문서로 통합되었는지를 추정해 보는 것은 모두 한 본문에 수록되어 있는 의미의 지평을 확대시켜주는 넓이의 연구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넓이의 해석은 앞서 말한 진실보다는 사실, 번역을 반역이라고 생각하는 사고에서 나온 산물이다. 성경이 사실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이나 처음의 문헌을 찾아가려는 시도들이 계속되었고, 번역은 반역의 왜곡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원어를 통한 첫 문헌으로의 탐구를 지향했다. 이런 방법은 3학년 때 신약 주석의 시간에서 배운 바가 있다. 본문 비평, 양식 비평, 전승사 비평 등이 그 예이다. 이러한 해석의 결과는 어떠한가? 성경을 낱낱이 해체하고 사실공방에 사로잡혀 참 진리를 가리는 결과를 낳았다. 그들은 <사실>에 매몰되어 <진실>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넓으면 깊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그들의 생각은 얕은 수준에서 끝이 났고, 이를 보완하기 위한 방법들이 제기되었다. 다음으로 통시적 관점의 한계를 보완한 공시적 관점 즉, 깊이의 관점에서 보도록 하겠다.
4. 더 깊게, 더 깊게_ 공시적 관점
넓이의 해석을 넘어선 깊이의 해석에 대해 알아보겠다. 공시적 해석, 그러니까 20세기 중반 이후 대두된 성서 해석의 일관된 흐름은 본문에 대한 “문학적”질문을 소중하게 여기는 특징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공시적 해석은 1968년 12월 뮬렌버그가 행한 연설, “양식 비평과 그 넘어”를 기점으로 영미권의 성서 학계가 수립한 성서 해석의 새로운 지평을 일컫는다. 사실, 기독교 신앙공동체에서 오랫동안 제 역할을 하였던 성서 해석은 원래 깊이의 해석이었다. 합리주의적 이성이 비판적, 과학적, 독서를 주창하기 이전 신앙공동체는 삶이라는 콘텍스트에서 성경말씀을 깊이 해석하거나, 아니면 성경말씀이라는 콘텍스트에서 삶을 역동적으로 해석하였다. 바로 넓이보다는 깊이를 지향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로 렉치오 디비나는 그 한 예에 속한다. 렉치오 디비나는 유럽의 수사 귀고2세가 12세기에 창안한 독서방식으로 알려져 있는데, 흔히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한 것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마음 깊이 경험하는 영성 훈련으로 간주된다. 렉치오는 구약시대의 예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들었지 눈으로 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렉치오 디비나는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방법론에서 성경의 말씀을 읽고 “살아내는”숩관을 형성시키는 삶으로 뻗어나간다. 그런 맥락에서 렉치오 디비나는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를 읽어가게 되는 습관을 계발하는 훈련이 된다. 이런 깊이의 해석은 성경본문이 사람의 말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는데 무게를 둔다. 말씀의 신성에 대한 신뢰가 없고서는, 말씀의 의미가 한 겹이 아니고 여러 겹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증이 없고서는, 도달할 수 없는 깨달음의 세계가 깊이의 해석이 추구하는 노력이다.
넓이의 해석에서 깊이의 해석까지 왔다. 하지만 여기에서 분명히 전제되어야 할 사항은 넓이의 해석 <없이> 깊이의 해석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넓이의 해석을 <넘어> 진정한 깊이의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깊이의 해석을 오해한 사람은 다른 모든 자료들은 다 무시하고 오직 자신의 <느낌>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마음>에만 집중하게 된다. 이는 자칫 자의적 성서 해석으로 갈 수 있고, 이단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2번에서 언급한 철저한 통시적 해석 없이는 공시적 해석 또한 나올 수 없다. 마치 율법 <없는> 자유가 아닌 율법을 <넘은> 자유가 진정한 자유인 것처럼 말이다. 설교자로 부름 받은 우리들은 이런 통시적 해석에 열심을 내어야 한다. 원어와도 싸워야 하고, 성경이 쓰인 역사적 상황과도 씨름해야 한다. 각자의 area를 넓혀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또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공시적인 깊이의 해석 또한 철저히 해야 한다. 주신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이를 오늘의 말로, 성도들의 콘텍스트에 맞춰 <들리도록> 설교하는 것이 우리들의 마땅한 임무인 것이다.
5. 넓이를 <넘은> 깊이, 깊이를 <넘은> 넓이 : New area
지금까지 왕대일 교수님의 책을 통해 넓이에서 깊이의 해석학으로의 패러다임의 전환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나는 이것에 한 발 더 나아가고자 한다. 바로 깊이에서 새로운 넓이로 말이다. 서두에 삽질에 대해서 언급했지만 한 곳만 꾸준히 깊게 파게 되면 자연히 넓이 또한 넓어지게 마련이다. 단순이 넓게만 파서 얕은 넓이가 아니라 깊이를 넘어선 <새로운 넓이>인 것이다. 나는 이런 New area를 꿈꾼다. 설교자로 부름 받고 목회자로 부름 받은 감리교 신학대학교 학생들이 자신만의 New area를 만드는 것 말이다. 이것은 넓이만 강조해서 되는 것도 아니요, 깊이만 강조해서도 되는 것이 아니다. 바로 넓이를 <넘은> 깊이, 깊이를 <넘은> 넓이를 말할 때 비로소 생기는 area인 것이다. 나는 이제까지 깊이의 해석에만 집중했던 것 같다. 나름대로 성서를 읽는 눈이 깊다고 자부했기 때문에 넓이를 공부하는 사람들을 한심하게 바라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과제를 통해 교수님의 수업을 통해 내가 생각한 깊이가 진짜 깊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넓이를 넘지 않은 깊이는 깊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나는 이제 넓이를 넘어보고자 한다. 그래서 이제까지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깊이를 체험하고자 한다. 넓이만 있어서도 안 되고, 깊이만 있어서도 안 된다. 바로 하나님의 충만함은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알 때 깨닫기 때문이다.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_에베소서 3장 19절
나가는 말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하지 않은 것 같은 요즘이다. 매주일 강단에서는 하나님의 생명력 있는 말씀들이 선포되는데 우리의 삶은 그러하지 못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악해지고 죽어가는 현실이다. 히브리서 말씀의 성취가 절실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_히브리서 4장 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세대를 초월하고, 국경을 초월하고, 세기를 초월하여 동일하게 역사했다. 죽음으로 치닫는 인생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춰 주었고, 연약한 자들에게 강건의 이유를 제시해 주었다. 그리고 인생의 목적이 없는 자들에게 유일한 목적을 보여주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간 곳에 자연히 일어나는 일들이다. 우리는 이 일들을 위해 부름 받았다. 하나님 말씀의 넓이와 깊이를 회복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넓이를 자랑하는 자들에게 그들을 압도할만한 넓이를 가지고 있어야 하고, 깊이를 자랑하는 자들에게 그들을 압도할만한 깊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넓이를 넘은 깊이, 깊이를 넘은 새로운 넓이를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 말씀의 활력과 예리함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확신하다.
참고도서/논문
1. 왕대일, 『구약주석 새로 보기』, 감신대성서학연구소, 2005
2. 왕대일, “성서해석학과 그 패러다임의 전환-넓이의 해석에서 깊이의 해석으로”, <신학과 세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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