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오리겐, 에바그리우스 너도 그렇다.
들어가는 말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 걸린 글귀로 나태주 시인의 풀꽃 중의 한 구절이다. 무엇이든 관심을 갖고 깊이 들여다보면 소중한 존재가 되고 그 진면목을 알 수 있다는 뜻을 담은 글이다. 그 사람의 한 면만을 보고 그 사람 전체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한 대상을 자세히 그리고 오래 보아야 그 사람의 참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은 바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말이다. 또한,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말이다. 어느 신학자의 한 책만을 보고, 한 구절의 말만 보고 그 사람 전체를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오늘 우리는 오리겐과 에바그리우스에 대해 자세히 그리고 오래 보려고 한다. 이제까지 단순히 플라톤 사상에 영향을 받은 철학자로 보던 단편적인 시선에서, 그의 생애와 사상 저작들을 오래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며 재조명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_ 오리겐
1. 오리겐의 생애 (약 185-254)
오리겐은 A.D 185년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기독교인이었으며 아버지는 레오니데스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수사학의 교사로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오리겐의 교육을 돌보았다. 그는 오리겐에게 일반 학문만이 아니라 성서의 근본 진리를 철저하게 배워 알게 했고 기독교적 인식의 기초를 배우도록 했다. 그러나 그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193-211) 때 일어난 기독교의 박해로 인하여 투옥되어 순교했다. 17세의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오리겐은 자신도 아버지와 같이 순교하기를 원했지만, 이를 눈치챈 그의 어머니가 그의 옷을 감추어 둠으로써 그가 밖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 후, 오리겐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문학과 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시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박해로 인해 성직자들이 모두 피난을 간 상태였기 때문에,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가르칠 사람이 없었다. 그는 몇 사람들을 데리고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었다. 감독 데메트리우스는 오리겐에게 세례문답 학교를 위임하였고, 그는 이 일을 본격적으로 담당하기 위해 철학 공부를 전적으로 중단하고 모든 철학책들을 헐값에 팔아넘겼다. 그는 철저한 금욕생활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그는 금식을 하고, 최소한의 수면시간을 취하고, 최대한의 청빈 생활을 하면서 겨울에도 겨의 반나체로 지냈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신을 신지 않고 길을 걸었고 침대 없이 맨바닥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이런 금욕주의는 극단에 이르러서, 자신의 성기를 거세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오리겐의 명성이 퍼지자,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사람들이 몰려와 제자에게 자신의 일을 맡기고, 더 높은 수준의 사람들을 교육하기 위해 새로운 학교를 만들었다. 그 후 그는 216년경에 팔레스틴을 여행하다가 가이사랴 감독들의 요청을 받아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데메트리우스는 성직자가 아닌 평신도였던 오리겐이 감독들을 앞에 두고 설교할 수 없다는 이유로 소환 명령을 내렸다. 몇 년이 지나 오리겐은 다시 팔레스틴을 경유해 가이사랴에 가게 되었는데, 그때에는 그곳 감독들이 오리겐에게 안수하여 그를 성직자로 만들고 자기들에게 설교하도록 요청했다. 이 소식을 들은 데메트리우스는 오리겐이 젊었을 적에 스스로 거세를 했다는 정보를 퍼뜨리고, 알렉산드리아에서 회의를 소집하고 오리겐을 파문했다. 그는 그 이후로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계속 가이사랴에 머물러 있으며 저술활동을 했다. 데시우스 황제 때 고문으로 인해 생을 마감하게 된다.(254)
2. 오리겐의 신학 사상
1) 신론
오리겐의 스승이었던 클레멘트는 하나님에 대하여 “그는 절대적으로 초월하시고, 말로 형언할 수 없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하나님 이해는 플라톤 철학의 영향이 컸다. 플라톤의 초월적 신론의 영향으로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은 신론 중심의 신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오리겐도 이런 철학적 전통을 이어받아, 하나님은 물질과 관계할 수 없는 초월자라는 사상을 전개시켰다. (1)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것이 육체가 아니라 <내적 사람>이다. (2) 하나님은 공간이나 시간에 제한받으시는 분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은 결코 물질적인 개념으로 생각할 수 없다.
여기까지 살펴보면 그리스 철학의 이신론적 초월적 신관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자세히 보아야 한다. 오리겐은 성서적인 근거를 들어 섭리의 개념을 강조했다. 하나님은 그냥 멀리 초연해 있거나 전혀 이 세계에 간섭하지 않는 분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이고 결국에는 모든 피조물들을 구원하시고자 계획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오리겐은 그의 책 「제일원리」의 신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질서 지우신 분이다… 그는 마지막 날에 선지자의 예언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을 부르셨다.” 그는 만물의 근원이시고 제일원인이신 철학자의 하나님을 주장하면서도,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섭리의 하나님도 주장한다. 그는 영지주의와 마르시온주의자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악한 신이라고 하는 주장에 변론하기 위하여 섭리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강조했다.
2) 성자의 종속성
아들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영원하고 아버지와 연합하여 있으나, 그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고 하나님만 못하다는 것이 오리겐이 주장하는 성자의 종속론이다. 오리겐의 사상에는 플라톤 철학의 특징인 위계구조가 있어서, 하나님은 완전한 형상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가시적 세계를 연결하는 중계자라고 말한다. 그의 로고스론을 보면 알 수 있는데, 하나님은 홀로 초월하신 일자이시고 이 세상은 다(多)의 세계이다. 따라서 이 둘을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중계자가 필요한데, 그분이 바로 로고스이다. 이 로고스는 일자와는 일자성을 공유하시고, 이 세상과는 다중성을 공유하신다. 그런데, 이 다자와 연관을 맺는다는 그 자체가 벌써 가변성을 의미하는 것이고, 하나님보다는 밑에 위치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만이 진짜 하나님이지, 그리스도가 하나님은 아닌 것이다. 또한 오리겐은 요한복음 주석에서 성부를 ‘정관사가 붙은 하나님(ho Theos)'으로 부르고, 성자를 '정관사가 없는 하나님(Theos)'으로 부른다. 그래서 그는 아들에게 하나님과 동등한 첫째 자리를 부여하지 않고, 하나님 다음의 두 번째 자리를 부여한다.
그러나 자세히 보아야 한다. 그는 당시 이방 철학자들이나 유대교에서 공격하는 논리를 반박해야 했다. 오리겐은‘왜 기독교는 유일신을 섬긴다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동시에 섬기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위계구조를 들어 변론하기 위해, 성자의 영원성과 성자의 종속성을 주장한 것이다.
3) 만유 회복
오리겐의 우주 이전 타락설 _ 하나님은 태초에 이성 존재들을 지으셨다.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자유 의지, 곧 자유스럽게 결단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받았다. 이 자유 의지를 가지고서 그들은 하나님을 본받는 일을 통하여 더욱 영적인 발전을 해 나갈 수 있었으나, 태만 혹은 게으름으로 인해 그만 타락하고 말았다. 그들 모두는 본래 모든 세대 이전에 순수한 이성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타락 이후에 그들 중 하나가 악마였다. 그는 자신의 자유 의지를 가지고서 하나님과 적대하는 자리에 앉게 되었다. 모든 권세들이 그와 함께 행동을 같이 하였으나, 영혼들만은 중립성을 지켰다. 그러나 그들은 비록 악마와 같이 그러한 심한 죄는 짓지 않았다 할지라도, 사함 받기 어려운 죄를 함께 범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벌로서 하나님께서 현재의 세상을 지으시고 영혼들을 육체에다가 묶어 두신 것이다.
만유 회복 _ 오리겐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이 세상에서 행한 행위에 대하여 벌을 받는다. 이 벌은 세상의 종말 시에 일어난다. 이 종말은 그의 아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하심이 전 피조 세계를 이리로 인도하게 될 때에 오게 된다. 이 종말의 때에 또한 원수들도 궁극적으로 극복된다. 오리겐은 만물에는 그 시작이 있었듯이, 종말이 반드시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마지막은 항상 처음과 유사하다"는 말은 이에 대한 그의 논제를 대신한다. 즉 그에게 있어서 종말은 흡사 시작과도 같은데, 이것은 바로 많은 차이점들과 상이한 일들이 하나의 동일한 시작에서 발원한다고 하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만사는 처음과 유사한 그 종말로 다시 회복되며, 한 처음은 다시 한 종말로부터 생기게 된다. 이 구원의 과정에는 심지어 "악한 군주들과 권세들, 세상 지배자들에게 종속되어 있는 자들이" 포함된다. 이 일은 "한 특별히 엄격한 정화 과정 가운데서" 일어나는데, 이 과정은 "합리적인 교육을 통하여" 단계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마귀 또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귀도 다시 선하게 될 가망성은 조금이나마 있게 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오리겐은 분명히 윤회와 마귀의 구원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자세히 보아야 한다. 그는 자신이 가지는 신학의 근저에 ‘선하신 하나님’을 설정하고 있다.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세상의 불평등에 대한 책임을 인간들 자신에게 돌렸다. 또한 그는 신의 징벌을 항상 자비롭고도 치료적인 것, 교육적인 것으로 보았다. 모든 악한 영들도 마침내 이 하나님의 치료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이 영들의 자유의지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모든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이끄시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4) 오리겐의 성서 해석
오리겐은 영지주의자들의 성서 폄하에 맞서 역사적 의미 너머에 싸여 있는 성서의 진리를 열정적으로 풀이했던 인물로서, 신·구약성서에 대한 체계적 해석을 시도한 최초의 교부이다. 오리겐은 성서에는 문자적으로는 수용하기 힘든 변칙적이고도 모순적인 내용들이 많으며, 이러한 걸림돌을 제거하고자 알레고리적(우의적)인 해석을 도입한다. 이러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근거가 존재한다.
첫째, 성령이 성서의 저자이기에 성서에는 모순이 없고, 성서의 깊은 뜻을 쉽게 해독하지 못하도록 감추어져 있다.(잠언 22:20-21) 특별히,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서는 예수가 성육신 한 이후에 참 의미가 드러났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만 하나님께서 의도하는 숨겨진 의미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리겐은 성서 해석은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교육받지 못한 일반적인 독서로서는 알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하며, 성숙한 신자로서 덕을 지키며 부지런히 연구하는 행위 속에서 하나님의 영과 접촉할 수 있다고 보았다.
둘째, 오리겐은 인간의 삼중적 인간관(데살 5:23)에 근거하여 성서의 삼중적 의미를 제시한다. 곧, 첫째는 문자적 또는 육적 의미이며, 둘째는 도덕적 또는 혼적 의미이며, 셋째는 우의적-신비적 또는 영적 의미이다. 이 세 가지의 의미 모두는 차별 없이 각각의 의미로써 인간의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 특별히 영적 순례에 빗대어진 영적 해석을 통해서 관조와 실천의 기독교인의 삶을 통한 하나님과의 연합에 비중을 둔다. 또한 플라톤주의자인 켈수스와의 논박에서, 오리겐은 영혼이 하나님에게 나아가기 위한 진정한 지식이 다름 아닌 성서라는 사실을 강조했으며,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변증 하기 위한 알레고리적 해석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그의 강조점이 철학이 아닌 성서에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리겐이 비판을 받는 이유는 그의 영적 해석이 다분히 주관적인 지성과 통찰력에 근거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아야 한다. 현대의 관점에서 그의 방법론을 비판하기보다는 그의 알레고리적 해석의 도입 배경과 목적을 기준으로 그의 의의와 태도를 재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
5) 순교에 대한 권면
오리겐은 아버지를 비롯한 수많은 성도들의 순교를 목격함으로써, 생을 마감할 때까지 순교를 열망했다. 단순히 성경을 읽고 비평하는 차원의 이론이 아닌, 성경을 살고 참여하는 과정으로써 성서 해석을 주장한 오리겐의 순전함은 그의 『순교에의 권면』에서도 나타난다. 『순교에의 권면』은 교회에 대한 박해가 극심할 때, 가이사랴의 장로에게 보내진 편지이므로 급박한 상황을 반영하듯 문체가 장황하지만, 초대교회의 박해 상황의 신앙의 순수함을 발견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오리겐은 “많은 은혜를 베풀어 준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순교의 죽음 외에 보답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는 점이다.(28) 『순교에의 권면』에 나타나는 오리겐의 사상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오리게네스에 따르면 순교자에게는 하늘의 상급(4)과 고난에 비례한 위로(42)가 있다. 더불어, 순교자의 자녀들은 그들은 더 이상 육체에 속한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38)
4. 나는 현재의 고난을 통해 의로운 자와 인자가 이루시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 핍박당하고,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주어질 하늘에 쌓여 있는 커다란 상급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38.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을 영으로 사랑하는 사랑 때문에 순교의 자리에 들어간 자신들의 자녀들을 위해 지금도 기도하고 있는 그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이지 육체에 속한 자녀가 아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시편 79:11)
42 고난에 동참하는 사람은 그들이 그리스도와 나누는 고난에 비례하는 위로를 나누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리겐은 재물에 대한 탐심으로 순교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에 대해서 엄중히 경고한다.(15)
15. “고통과 시련을 이겨 낸 사람이 이렇게 하지 않은 자들보다 그들의 순교로 구별된 덕을 보여 주었던 것같이... 순교자처럼 가난한 우리들은 자녀들에 대한 애정과 자신의 재산을 구하는 이러한 진실하지 못한 영광을 짓밟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 사랑을 고백할 것이다.
둘째, 오리겐은 순교를 세상의 고난이기 이전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시험(6) 혹은 우리의 죄의 징벌(25)로써 이해한다.
6. 그러기에 우리는 현재의 시험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대한 시험과 시련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25. “자만하지 말라.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한 벌을 받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들로 인해 깨끗함을 받기 위해 이러한 고통들을 기쁨으로 견디어 내고 있다.”
셋째, 순교는 세상으로부터 주어지는 수동적인 고난이 아니라, 고난으로의 능동적(26)이며 기쁜 참여이다. 고난에 참여하는 자에게는 천사와 모든 만물이 함께 기뻐하며(18), 하나님이 우리의 증인이자 친구가 되심으로, 몸만 죽이는 권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34) 연약함을 극복한다.(26)
18. 천국에 있는 천사는 우리를 기뻐하고, “강들이 그들의 손으로 박수하며, 언덕들이 즐거움을 인하여 노래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나무들의 가지들을 가지고 박수를 칠 것입니다.”
26 그(막내)는 어머니에게 자신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권고하며, 호소했습니다. 그녀는 아들의 말을 따랐으며, 그 자신의 아들이 이 모든 것을 참아 내도록 많은 권고를 함으로써 왕을 비웃었습니다. 그리고 그 막내아들은 고통스러운 심문을 당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고문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왜 그렇게 당신은 느린가?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는 명령을 따를 수가 없다.”....
26. 하나님의 대한 사랑과 인간의 연약함은 우리 안에서 동시에 공존할 수 없는 것입니다.
34. “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나의 증인이 되면 나는 너의 증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너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종이 아닌 친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였습니다. “몸만 죽이고 그 이상의 권세가 없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는 우리의 몸뿐 아니라 우리의 영혼까지 지옥에 보낼 수 있는 자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넷째, 순교의 가치는 다음과 같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30, 43), 하나님과 완전한 연합과 구원을 향한 가장 빠른 길이 순교이다. 또한 순교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에 참여함으로써(39), 고난에 인내함으로써 행위를 위한 지식을 추구함을 드러낸다.(43)
30. 또한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죄와 죄 사함은 세례 없이는 받을 수가 없다는 것과 (복음서의 법에 의하면) 죄 사함을 위해 성령과 물로 다시 세례를 받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순교의 세례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39. “....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주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 1서 2:15-17) 이리하여 우리는 일시적인 것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주님의 다음과 같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사....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요 17:21-22)라는 기도에 일치하여 성자와 성부와 성령과 하나 되는 것을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삼고 살아가십시오.
43. 어떤 특정한 지식에 적당한 행위를 위한 지식을 추구한다는 것을 보여 주도록 합시다. 어떤 종류의 죄로 인한 모든 더러움으로부터 완전한 ‘순수성’을 우리에게 명백하게 나타내 보여 주도록 합시다. 오래 참는 하나님의 자녀로, 오래 참는 그리스도의 형제로 모든 불의의 상황 속에서도 ‘인내’하는 모습을 보여 주도록 합시다.(잠언 14:29)
이러한 점에서, 오리겐은 관조와 실천을 통해 하나님과의 완전한 연합을 추구하는 그의 신학의 절정이자 가장 순수한 것으로써의 순교를 제시하며 권면한다, 따라서, 한 사람의 철학적 신학자라고 평가절하하기보다는 순교를 평생토록 열망한 “위대한 교부요, 성서신학자요, 영성의 대가로서 ‘교회의 사람’(ecclesiastikos)”으로서의 오리겐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_ 에바그리우스
사막 교부들 중에서 신비주의와 관상기도에 대해서 매우 많은 교훈을 남긴 에바그리우스. 그의 저술은 매우 많이 남아있지만, 그 진위성과 난해한 의미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오늘 우리는 에바그리우스의 작품 중 『프락티코스』를 통해서 그가 가지고 있던 신비주의 사상과 관상기도에 대한 대략적으로나마 이해하려고 해 본다.
1. 독수도사 에바그리우스의 생애
독수도사 에바그리우스(Evagrius the Solitary)는 에바그리우스 폰티코스(Evagrius pontikus)라고도 알려져 있으며 345년이나 346년에 폰투스(pontus)의 이보라(Ibora)에서 태어났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그루지아 사람이라고 한다.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제자인 그는 대(大)바실(St. Basil the Great)에 의해 봉독자(reader)로 임명되었고, 신학자 그레고리(St. Gregory the Theologian,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에 의해 부제(副題)에 임명되었다. 381년에는 신학자 그레고리를 수행하여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참석했다. 그는 사제로 서임되지 않았다. 그는 잠시 예루살렘에 머문 후, 383년에 이집트로 가서 16년 동안 지냈다. 2년 동안 니트리아(Nitria)에서 지낸 후, 켈리아(Kellia)사막으로 들어가서 399년에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집트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켈리아의 사제인 알렉산드리아의 마카리우스를 영적 아버지로 모셨다. 그는 스케티스의 사제요 영적 아버지인 이집트의 마카리우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이 두 성인을 통해서 사막 교부들의 제1세대 및 그들의 순수한 형태의 영성에 접했다.
에바그리우스의 많은 저술에서 두 가지 경향(사변적인 경향과 실질적인 경향)을 식별할 수 있다. 사변적인 측면에서, 그는 오리겐(185-354)을 크게 의지하여 그에게서 영혼의 선재,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의 궁극적인 회복 등에 대한 특별한 이론을 받아들였다. 이 이론들은 제5차 에큐메니칼 공의회(553)에서 정죄되었다. 실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는 이집트, 주로 콥트의 사막교부들의 생생한 경험을 활용했고, 실제로 말년에는 사막 교부들 사이에서 생활했다. 그는 ‘심리학적 통찰’과 ‘생생한 묘사의 은사’, 그리고 ‘영적 과정의 다양한 단계’를 정밀하게 분석하고 정의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그의 가르침은 후대의 작가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의 제자 존 카시안(St. John Cassian)은 스승이 오리겐에게서 취한 의심스러운 이론들을 버리고 그의 가르침의 실질적인 측면을 서방 라틴세계에 전했다. 동방의 헬라 세계에서는 그 후 에바그리우스가 고안해 낸 기술적인 어휘들이 표준적인 것으로 사용되어 왔다. 포티케이 디아도쿠스, 존 클리마쿠스, 고백자 막시무스 등의 저술, 그리고 고대시리아의 전통, 니느웨의 이삭의 「Mystic Treatises」등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성 니코디코스가 『필로칼리아』에 포함시킨 글들은 모두 에바그리우스의 실질적인 측면에 속하는 것이며, 의심스러운 사변은 거의 포함하지 않고 있다.
2. 에바그리우스의 작품들
에바그리우스의 작품 목록은 상당히 방대하여 정확한 작품 수와 제목을 모두 제시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그의 작품들은 매우 체계적이지만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의 사상은 심오하여 때때로 많은 오해와 논쟁의 소지를 낳았고 어떤 개념과 교설은 오해를 받아 일부 작품은 단죄를 받기도 했다.
1) 프락티코스(praktikos)
2) 그노스티코스(Gnostikos)
3) 케팔라이아 그노스티카(Kephalaia Gnostica)
4) 휘포튀포시스(Hypotyposis)
5) 수도승 에울로기우스를 위한 가르침(Treatise to the Monk Eulogius)
6) 안티레티코스(Antirrhetikos)
7) 여러 악한 생각에 관하여(Treatise on Various Evil Thoughts)
8) 악한 생각에 대하여(De Molignis Cogiationibus)
9) 수도승을 위한 권고(Ad Monachos)
10) 동정녀를 위한 권고(Ad Virginem)
11) 기도론(De Oratione)
12) 프로트렙티쿠스(Protrepticus), 파래네티쿠스(Paraeneticus)
13) 서간(Letters)
14) 성경주해(Scriptural Commentaries)
15) 여러 금욕적 주제(Various Ascetic Treatises)
3. 에바그리우스의 핵심 사상
1) 지성(知性)의 원(原)창조
에바그리우스에 따르면, 하나님은 본래 자신의 형상에 따라 이성적 존재(logika)들을 창조하셨는데, 그들이 순수 정신(nous)이다. ‘하나님의 형상’인 정신의 창조 목적은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인식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정신들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나 그 분과의 일치에 있어서나 서로 동등하게 창조되었다. 에바그리우스는 ‘지성’이란 용어로써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2) 영혼과 육체로 된 지성
에바그리우스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인간의 원(原)타락을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창조 이후 순수 지성은 하느님을 인식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하게 되었고(지성의 타락), 그 결과 육체와 결합된 영혼으로 전락했다. 따라서 인간은 더 이상 순수한 지성이 아니고 육체와 영혼이라는 또 다른 차원을 지니게 되었다. 이처럼 에바그리우스는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와 달리 육체에 결합된 하나의 영혼을 지니며, 타락의 정도에 따라 크게 천사와 인간, 그리고 악령과 같은 세 범주의 타락한 지성으로 나뉜다고 보았다.
이 세 범주의 타락한 지성은 모두 영혼과 육체로 혼합된 존재다. 그러나 각각은 서로 다른 형태의 육체를 지닌다. 인간의 조건은 천사의 조건과 더불어 악령의 조건에도 연결되어 있다. 천사는 우리가 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친구인 반면, 악령은 우리를 악에 떨어지게 하는 적이다.
3) 영혼의 세 부분
에바그리우스에 따르면 인간 영혼은 이성부(Reasonable part)와 정념부(Irascible part)와 욕망부(Concupiscible part)로 구성되어 있다. 영혼의 이런 삼중 구분은 그리스 철학 전통, 특히 플라톤에게서 유래하는 것으로 에바그리우스 인간학의 주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세 부분으로 구성된 영혼은 타락한 지성의 구원을 목표로 한다.
이성부는 영혼의 가장 고귀한 부분으로, 타락한 지성의 직접적 연장(延長)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성부를 통해서 지성은 여전히 그 본래의 능력을 소유하게 된다. 흔히 욕정부(Passionate part)로 통칭되는 정념부와 욕망부는 영혼이 육체에 연결되는 부분들이다. 본질적 인식에서 멀어진 타락한 지성은 한 육체 안에 있는 영혼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므로 육체를 정화하고 욕정부를 정화함으로써 이성부는 다시 본질적인 인식을 얻게 된다. 결국 수도승 생활 혹은 영성생활은 영혼의 이 다양한 부분들에 부합하는 적절한 덕을 쌓고 인식을 얻기 위한 일종의 영적 투쟁이다.
4) 영성생활의 두 측면
에바그리우스의 영성생활은 크게 프락티케(수덕생활,praktiké)과 그노스티케(영지, gnostiké)이라는 두 영역으로 구분된다. 수덕 생활은 영혼의 욕정부를 정화하는 영적 방법이고, 그노스티케은 영혼의 이성부가 인식 혹은 관상에 전념하는 것이다. 즉 수도생활은 욕정부와 관련된 ‘악’과 이성부가 관련된 ‘무지’를 제거하여 영혼 안에 ‘덕’을 쌓고 ‘인식’을 얻기 위한 전적인 투쟁이라 할 수 있다.
수행의 직접적 목표는 아파테이아(초탈,apatheia)이다. 이것은 참된 사랑을 가능케 한다. 수도승은 오직 사랑에서 인식으로 건너갈 수 있다. 완전한 초탈은 영혼의 욕정부와 정념부가 건강해지는 것을 뜻하며, 이 두 부분은 함께 작용하여 영혼을 건강한 상태로 유지하며, 영혼의 가장 높은 부분인 이성부가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5) 인식의 여러 차원
육체와 결합된 영혼으로 전락한 지성은 일단 초탈에 도달하면서 본래 창조 목적인 ‘본질적인 인식’에 닿을 때까지 여러 차원의 인식을 통해서 단계적으로 올라가게 된다. 에바그리우스는 인식을 크게 퓌시케(physiké)와 테올로기케(theologiké)라는 두 차원으로 나눈다. 퓌시케는 ‘낮은 차원의 인식으로 자연에 대한 관상 혹은 인식(자연학)’이라 할 수 있다. 테올로기케는 가장 높은 차원의 인식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관상 혹은 인식(신학)’이다.
6) 『프락티코스』의 구성
에바그리우스는 「아나톨리우스에게 보낸 편지」를 『프락티코스』와 별도로 두었다. 일종의 발신 서간인 이 편지는 머리말과 맺음말 역할을 한다. 『프락티코스』자체는 연속적인 담화의 형태로 편집되지 않고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단락들로 구성되어있다. 『프락티코스』는 100개의 장으로 되어 있다.
남성현 교수는 프락티코스를 일곱 부분으로 구분한다.
1) 100장(The hundred chapers) : 1~5장
2) 악령의 8가지 사념들(The eight kinds of evil thoughts) : 6~14장
3) 8가지 격렬한 사념들에 대비하여(Against the eight passionate thoughts) : 15~39장
4) 교훈(Instructions) : 40~56장
5) 초탈에 가까운 상태(The sate bordering on Apatheia) : 57~62장
6) 초탈에 있는 표시(On the signs of Apatheia) : 63~90장
7) 성스런 수도승들의 금언(Saying of the Holy Monks) : 91~100장
에바그리우스에 따르면, 수덕생활은 “영혼의 욕정부를 정화하는 방법”으로 정의된다. 수덕생활의 목적은 초탈에 이르는 것이며, 초탈은 영적 인식에 필요한 조건이다. 수덕생활은 실질적으로 덕의 실천이며, 주로 ‘사념(악한생각)들과의 싸움’이다.
pt78. 수행은 영혼의 욕정부를 정화하는 영적 방법이다.
에바그리스우스는 프락티코스(수도승, praktikos)라고 부르는 사람은 독거수도승을 말한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물러난 사람이며, 인간적인 일에 종사하기를 포기했을 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의 활동적인 역할을 받아들이길 포기한 사람이다. 즉, 관상에 전념하고 헤시키아(hésychia)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실제로 『프락티코스』에서 언급된 가르침은 공주(共住)수도승이 아닌 독거(獨居)수도승 또는 반(半)은수생활을 하는 수도승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7) 여덟 가지 생각(혹은 사념)과 그 순서
에바그리우스의『프락티코스』는 그의 작품들 중에서도 여덟 가지의 주요 악한 생각에 대한 상세한 분석과 그 각각에 대한 치료법을 제시한다. 에바그리우스에게 ‘악한 생각’은 ‘악령’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pt6. 모든 생각을 포함하는 발생학적 생각은 모두 여덟 가지다. 바로 탐식(gluttony), 음욕(impurity), 탐욕(avarice), 슬픔(sadness), 분노(anger), 태만(acedia), 허영(vainglory), 교만(pride)이다. 이 모든 생각이 영혼을 괴롭히느냐 괴롭히지 않느냐는 우리 능력밖에 있다. 하지만 그 생각들이 영혼 안에 머무르냐 머무르지 않느냐, 욕정을 일으키느냐 일으키지 않느냐는 우리에게 달렸다.
에바그리우스가 제시하는 여덟 가지 생각은 어느 정도 경험에서 오는 논리적 순서를 따른다. 예컨대, 음욕은 식욕을 채운 사람에게 자연적으로 따라온다. 돈을 사랑하는 이가 돈을 모으지 못하면 슬퍼하거나 분노한다. 헛된 영광과 교만은 다른 생각에 맞서 싸워 승리한 수도승에게 위협이 된다. 그러나 이 생각들이 체계적으로 오는 것은 아니다. 에바그리우스는 단지 일반적인 방식으로 영적 진보의 순서에 따라 여덟 가지 생각을 나열하고 있을 뿐이다.
탐식과 음욕은 수도승이 초기에 주로 맞서 싸우는 것들이다. 분노와 영혼의 정념부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은 무엇보다도 수도승이 영혼의 욕망부에서 유래하는 생각들을 쳐부수면서 초탈의 낮은 단계에 도달할 때 맹위를 떨치게 된다. 헛된 영광과 교만의 악령들은 무엇보다도 다른 악령들이 물러갈 때 그 모습을 드러내며, 수덕생활에 진보한 수도승을 더욱 맹렬히 공격한다.
pt63. 지성이 분심 없이 기도하기 시작하면 영혼의 정념부 주변에서는 밤낮으로 온갖 전투가 벌어진다.
8) 악령(evil)
에바그리우스에게 사념들과 악령들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두 단어는 자주 혼용(混用)된다. 하지만, 악령들은 그들 고유의 실체와 인격을 지닌 별개의 존재들이다. 수덕생활은 주로 사념에 맞선 싸움이라 할 수 있지만, 이 ‘사념’은 단지 수도승과 맞서 싸우기 위해 악령들이 사용하는 수단일 뿐이다. 실제의 적은 ‘악령’이다. 금욕생활은 본질적으로 악령과의 싸움이다. 이 개념은 일반적인 교회들에게 통용되는 생각들이다. 수덕생활의 끝에 이를 때 수도승에게 승리가 주어진다.
pt60. 완전한 초탈은 수덕생활에 반하는 모든 악령과 싸워 승리한 후에야 영혼 안에 깃든다. 반면, 불완전한 초탈은 여전히 영혼과 싸우는 악령의 능력에 대항해야 한다.
이 전투에서 악령들이 선호하는 전술은 속임수다. 그들은 패배를 가장하여 퇴각하다가 느닷없이 급습하는 경우가 잦다.
pt44. 악령들이 수도승과 맞서 싸우면서 무력해지면, 약간 물러나 덕들 가운데 어느 것에 소홀한 지 살핀다. 그리고 소홀한 부분을 틈타 갑자기 들이닥쳐서 불안한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다.
악령들은 수도승과의 싸움에서 영혼의 상태를 살피곤 한다. 내면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직접 볼 수는 없다. 하나님만이 사람의 마음을 아신다. 그러므로 악령은 외적 표지를 관찰하는 일 말고는 영혼의 움직임을 알 수 없다.
pt47. 발설된 말이든 육체의 돌발적 움직임이든, 그것은 영혼 안에 현존하는 욕정의 표시이다. 이 표시를 통해 원수들은 그 생각이 우리 안에 있는지, 우리가 그 생각 때문에 괴로워했는지, 우리 구원을 염려하여 그 생각을 쫓아 버렸는지 감지한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우리 정신을 아신다. 그분이 마음 안에 감추어진 것을 아는 데는 표시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악령들의 모든 활동은 수도승이 수행생활의 끝인 초탈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들은 또 영혼의 욕정부를 공격하고 생각을 통해 욕정을 자극한다. 악령은 생각을 불어넣고, 생각이 오래 머물 때 우리 안에 욕정을 불러일으킨다.
pt84. 수행의 목표는 사랑이고, 인식의 목표는 신학이다. 수행의 시작은 신앙이고, 인식의 시작은 자연에 대한 관상이다. 영혼의 욕정부를 공격하는 악령은 수행에 반대되고 이성부를 괴롭히는 악령은 온갖 진리의 적이자 관상의 적대자이다.
너도 그렇다.
신학은 지적 동의를 구하는 작업이 아니다. 신학은 이론(theory)가 아니라 묵상과 참여를 수반하는 관조(theoria)이며, 하나님과의 교통과 세상으로의 나감을 목적으로 한다. 오리겐은 삶과 동떨어진, 관념으로서만 머무는 신학이 아니라 관조와 실천을 통해 하나님과의 연합을 열망하며, 삶 속에서의 순교를 열망한 살아있는 신학자였다. 에바그리우스 또한 결코 사념적이지 않으며 체험을 바탕으로 한 신학을 전개하며 금욕과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이러한 차원에서, 이들의 신학함의 자세는 신학과 영성 사이의 상보 관계를 놓치기 쉬운 신학교에 많은 것을 시사한다.
물론, 오리겐과 에바그리우스와 관련된 여러 논쟁적 요소들에 대해서 신학적 비평이 필요할 것이다. 이집트에서 가져온 금은보화로 하나님의 성막을 치장했듯이, 이 세상의 학문을 통하여 기독교 신학을 체계화·조직화하려는 변증적인 관점이 여전히 중요하지만, 여로보암이 이집트의 황금으로 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선 안 될 것이다. 곧, 세상에 이해 가능하고 성서에 적절한 신학적 민감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적 관점에서 그들의 방법론에 대한 비판에만 집중하기보다는 그들의 신학의 목적, 그 순교에 대한 “순수성”에 담긴 영성과 신학 사이의 관계를 재평가해야 된다. 곧 이들 모두가 부지런한 연구와 기도, 수덕의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을 위한 봉사’에 참여하고자 노력했다는 점이다. 즉, 이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과 영적 삶의 소원은 분리되지 않았다. 또한 이들은 신학을 ‘하며’, 나아가 신학자가 ‘되는’ 신학과 영성의 본래적 통전성을 잃지 않도록 노력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를 통해서 체험적 영성이 없는 사변과 이론에 치우친 신학의 공허함이 아닌, 삶 속에서 살아있는 신학을 전개한 웨슬리의 영성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가지길 기원한다.
참고도서/논문
1. 왕대일, “성서해석-하나님을 위한 변론”, 「신학과세계」(2010. 12) 겨울호.
2. 정용석 외 공역, 『알렉산드리아 기독교: 클렌멘스와 오리게네스』
(서울: 두란노, 2011)
3. 정용석, 『기독교사상사1』(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4)
4. 이용주, 『오리겐의 성서해석』(감리교신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5)
5. 홍삼열, 『오리겐의 보편주의적 신학에 대한 연구』
(감리교신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2)
6. 유진 드 페이 저, 박창훈 옮김, 『오리게네스의 영성』, 누멘, 2012
7. 앤드루 라이스 저, 배성옥 옮김, 『서양 신비사상의 기원』, 분도출판사. 2001
8. 아토스 성산의 성 니코디모스, 고린도 성 마카리오스 편찬, 엄성옥 옮김,
『킬로칼리아 1』은성출판사. 2001
9.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저, 허성석 역주·해제 『프락티코스』, 분도출판사. 2011
10. 남성현 역, 「사막교부들의 금언집」 두란노아카데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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