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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신학 과제

구약주석 새로 보기, 창문을 통해 거울에 비춰

by 보통목사 2022.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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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통해> 거울에 <비춰>

 

 

머리말 

  창문과 거울의 차이를 아는가? 창문은 무언가를 바라볼 때 <통해>서 본다는 의미가 강하다. 집 안에서 밖의 풍경을 본다거나 건물 안에서 밖을 본다고 할 때는 창문을 통해 봐야 함이 옳다. 사람들은 좀 더 정확하고 깨끗한 정보를 보기 위해서 때로는 창문을 닦기도 하고, 새로운 창문으로 교체하기도 한다. 바로 창문은 무언가를 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요, 방법이 되는 것이다. 반면 거울은 무언가를 볼 때 <비춰> 본다는 의미가 강하다. 내 얼굴을 보고 싶을 때 거울에 비춰 내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은 창문과 같이 무언가를 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고 하기보다는 목적 자체가 된다. 그것에 비추인 하나의 대상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성경의 해석도 이 두 가지의 방법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먼저는 창문의 방법대로 성경 텍스트를 <통해> 무언가를 들여다보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좀 더 선명하고 깨끗한 정보를 얻기 위해 다양한 방법들을 적용시킨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어떻게 쓰이게 되었는가) 기존 성서 해석의 방식이 이런 창문의 방법과 같았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거울의 방법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 거울의 방법은 성경을 수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를 목적으로 보는 것이다. 본문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가에 대해 그 본문 자체로 해석하는 것이다. 말씀에 비춰 말씀을 바라보는 것이다. 구약주석 새로 보기를 통해 기존의 해석 방법인 창문의 방법을 알아보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거울의 방법을 알아볼 것이다. 이 레포트를 통해 <통해>가 아닌 <비춰>의 해석의 길이 열리길 소망한다. 

 

 

몸 말

 1. 창문을 <통해>

    이 창문을 통한 방법은 전통적인 성서 해석 방법론이다. 더 선명한 그림과 정보를 얻기 위해 창문을 닦고 수정하고 보완하는 방법은 세대를 막론하고 끊임없이 시도되어 온 과제이다. 그래서 성경의 원 저작자를 밝히는 데 온 에너지를 쏟았고, 언제 각 텍스트가 기록되었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높았다. 늘 성서본문이 언제, 어디에서, 어떤 계기에, 무슨 의도로, 어떻게, 누가 누구를 대상으로 써지게 되었는지를 규명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였다. 바로 그런 조건들이 분명할 때 더 선명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런 작업을 계속할수록 선명해지기는커녕, 여러 오류들이 발견되고 심지어는 창문을 깨는 결점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런 문제점은 성경을 더 선명하게 보기는커녕 깨진 그림만 보는 결과를 낳았다. 

    이런 ‘창’의 해석은 많은 문제들이 있다. 그중 가장 큰 문제는 성경의 텍스트의 의미를 찾기 위해 성경의 텍스트가 아닌 역사적 정황 등의 이차적인 자료들에 더 집중하게 된 것이다. 이는 어떤 사람을 알기 위해 그 사람과 직접 대화를 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배경이나 학벌, 집안 사정, 남들의 평판에 더 집중하는 것과 같은 꼴이다.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모름지기 그 사람과 깊은 <대화>를 나눠보고 그 사람과 함께 <살아> 볼 때 진짜 모습을 알게 되는 법이다. 하지만 그 방법이 워낙 시간이 오래 걸리고 내가 직접 그 삶과 함께 해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려고 한다. 이차적인 잣대로 평가한 그 사람은 진짜 그 사람의 모습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성경의 해석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창문의 해석을 사용하게 되면 성경 텍스트 자체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이차적인 자료들에 집중하는 오류를 쉽게 범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 텍스트의 진짜 의미는 그 성경 텍스트에서 알 수 있는 것이지 다른 이차적인 자료들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성경의 텍스트와 깊은 <대화>를 나눠보고 그 텍스트와 함께 <살아> 볼 때 진짜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창문의 해석의 한계를 극복한 것이 <거울>의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왕대일 교수는 거울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지만 나는 이 해석 방법이 거울이라 생각되어 교수님의 의견과 내 생각을 접목시켜 글을 발전시켜 나가도록 하겠다. 먼저 공시적 해석의 세 기둥 중 하나인 수사학에 대해 알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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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수사학 : 통시에서 공시로 가는 첫 단추 

    역사비평적 성서 해석에 대한 도전은 1960년대에 대두된다. 1968년 뮬렌버그가 한 강연, “양식 비평과 그 넘어”의 강연과 함께 성서 학계는 양식 비평에서 수사학으로 넘어가는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수사학이 구약성서에 대한 해석학적 도구로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이 수사학은 본문이 어떤 형성과정으로 완성되었는가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본문 자체의 소리를 듣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 우리가 읽는 본문이야말로 “치밀하게 짜여 있는 문학 작품”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는 까닭이다. 이런 변화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이제까지 양식이나 원 저작자 혹은 1차적 자료를 보기 위해 시대를 따라가던 해석에서 벗어나 주어진 텍스트 자체에서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찾아보려고 한다는 것은 굉장한 시각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많은 학자들이 이 방법을 발전시켜 나갔다. 하지만 공시적이라는 것이 통시적인 것을 무시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앞의 과제에서도 밝혔듯이 통시적 <없는> 공시적이 아니라 통시적을 <넘은> 공시적이 올바른 진정한 공시적 해석이라 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바라본다면 수사학적 성서 해석의 정립에 양식 비평이 간과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넘고 극복해야 할 과제라는 것에 동의할 수 있다. 양식 비평의 유산을 공시적으로 재조율 하려는 시도가 많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참으로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3. 수사학의 방법론 : 뮬렌버그를 중심으로 

    뮬렌버그가 제안한 수사학적 성서 해석은 주로 성서본문에 대한 “구성의 예술”을 파악하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것은 성서본문을 문학작품으로 보고 그 문학작품의 외형상의 특징을 분석하는 작업으로 구체화되었다. 뮬렌버그는 성서 해석자가 지녀야 할 “문학적 감수성”(literary sensitivity)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일깨워주었다. 다음은 뮬렌버그의 수사학적 해석 방법이다.  본문을 문학적 단위들로 나눈다.  본문을 구성하는 단위들이 모여서 이룬 모습을 식별한다.  저자의 생각이 한 단위에서 그다음 단위로 어떻게 발전되고 있는지를 도표로 나타낸다.  지금까지 살핀 모든 결과들을 종합해서 저자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또는 각 단위 속에 주어져 있는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한다. 뮬렌버그가 이룬 수사학적 성서 해석의 특징은 한편으로는 본문을 구성하는 문학 단위들로 구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단위들이 본문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서로 관련을 맺으면서 연결되는지를 규명한다는데 있다. 이처럼 수사학적 비평은 한 문학 단위의 개별적인 독특성을 찾아내는데 집중한다. 본문 안에 사용된 언어의 종류와 그들이 배열된 방법들을 살펴보면서 본문의 각 단위들이 지닌 문학적 개성을 확인한다. 수사학적 해석은 텍스트를 창문으로 삼지 않는다. 무엇인가를 알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다. 텍스트는 그것 자체가 감상의 대상인 그림이기 때문이다. 

 

 3. 거울에 <비춰>

    우리는 이제까지의 통시적 방법론에서 벗어난 공시적 방법인 수사학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것이 바로 창문의 해석에서 거울의 해석으로 넘어가는 첫 단추라 생각한다. 그럼 거울의 해석은 무엇인가? 수사학과 마찬가지로 택스트가 원자료를 보기 위한 하나의 창문으로만 사용됐다면 그 텍스트를 거울에 <비춰> 바라보자는 것이다. 그 텍스트 자체의 의미에 집중을 하자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어떤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과 대화해보고 그 사람과 살아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바로 텍스트와 대화해보고 텍스트와 함께 살아보는 것이 거울에 비추는 작업이라 할 수 있겠다. 

  

   설교자에게 이런 패러다임은 상당히 중요하다. 설교자가 하나의 본문과 씨름하며 대화하고, 그 말씀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아무런 힘이 없다. 그야말로 울리는 꽹과리와 같은 것이다. 말씀을 통해 무언가를 발견하려고 하지 말고, 말씀을 비춰 그 말씀의 진정한 의미와 하나님의 마음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요즘 세대는 말씀을 너무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자기 계발서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들을 성경과 짜 맞추어서 마치 성경이 이차적인 자료인양 설명될 때에는 <성경이 죽었다>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은 영원하다고 외치는 설교자가 도리어 말씀을 죽이는 외침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이 살아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창문을 <통한> 해석이 아니라 거울에 <비추>는 해석이 절실하다. 말씀을 더 정확히 알기 위해 조금은 어려운 길을 택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와 있는 주석이나 역사적 정황들을 통해서 의미를 알아내는 것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 작업 없이 이뤄지는 해석은 자칫 개인적인 생각만 말하는 <그들만의 리그>가 될 위험성이 다분하다. 이런 해석들을 <넘어> 설교자의 치열한 씨름과 고민이 필요한 것이다. 끊임없이 텍스트에 말을 걸어야 한다. 모든 순간에서 말씀에게 대화를 걸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과 함께 살아야 한다. 삶에서 말씀이 어떠한 힘을 가지고, 능력을 주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게 우리 삶의 정황에서 표현되는지는 그대로 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다. 말씀대로 치열하게 살아갈 때 마침내 말씀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는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이 우리를 읽는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4. 창문을 <통해> 그리고 거울에 <비춰>

    지금까지 창문을 통한 방법과 거울에 비춰보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 둘은 마치 실과 바늘처럼 함께 있어야 함이 옳다. 어느 것 하나가 소홀하게 되면 결코 좋은 성서 해석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창문을 통해 보는 것처럼 성경을 많은 역사적 사건들과 방법들을 이용해서 선명한 그림을 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특히나 설교자에게 있어서 이러한 노력은 더욱 필요하다. 이는 평신도들이 보지 못하는 더 깊고 선명한 그림을 보기 위한 필수 과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문에 너무 매진하는 것 또한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다. 통시적인 방법에만 집중했을 때, 그림이 선명해지기보다는 깨지고 모순되는 점이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시적인 방법인 창문을 <통해> 보았다면 공시적 방법인 거울에 <비춰> 보는 작업이 함께 가야 한다. 텍스트 자체를 거울에 비춰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면 그 텍스트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지 또렷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꼭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창문을 통한 노력이 있었느냐에 대한 물음이다. 우리에게 이 두 가지의 해석이 균형 있게 성장하길 소망한다. 그럴 때에 이 시대를 깨우는 설교자, 이 세대를 위해 기도하는 평신도들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한다. 

 

나가는 말

  책의 내용을 조금 더 발전시켜 전개해 보았다. 역사비평의 한계를 마치 창문을 <통해> 보는 것과 같다는 비유에서 힌트를 얻어 거울에 <비추>는 방법론을 전개시켜 보았다. 조금 억지스러운 부분도 없지 않아 있지만 나름대로는 일관성 있고 이해가 가는 글이라 생각한다. 요즘과 같이 설교자가 중요한 시기도 또 없다. 한 사람의 설교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느냐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결단하기도 한다. 리포트를 쓰면서 계속해서 내 심장이 뜨거웠던 것은 창문을 <통해> 그리고 거울에 <비춰> 성경을 해석하고 선포하는 참다운 설교자들이 많아지길 소망하는 꿈 때문이었다. 창문을 넘어 거울로 비출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과 위대하심이 드러날 것이다. 어거스틴의 말로 이 리포트를 마치도록 하겠다. 

 

‘논쟁할 자들은 논쟁하라. 난 하나님을 놀라워하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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