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교.부.와.웨.슬.리.의.영.성.을.중.심.으.로
Agere Contra! 거슬러 행한 사람들
목 차 Contents
Ⅰ. 서론 1. 문제제기 및 연구목적 Ⅱ. 사막교부의 영성 1. 시대적 배경 2. 사막교부의 영성 1) 기도 2) 겸손 3) 가난 4) 순종 5) 사랑 Ⅲ. 웨슬리의 영성 1. 시대적 배경 2. 웨슬리의 영성 1) 기도 2) 겸손 3) 재물의 사용 4) 순종 5) 사랑 Ⅳ. 사막교부와 웨슬리의 만남 1. Agere contra! 거슬러 행한 사람들 2. 거룩한 운동선수들 Ⅴ. 사막교부와 한국교회의 만남 Ⅵ. 결 론 |
Ⅰ. 서론
1. 문제제기 및 연구목적
이번 초대교회 수도원 운동 세미나를 들으며 계속 들었던 생각은 이 시대에 사막 교부와 같은 영성의 소유자는 누가 있을까?라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은 그들의 깊은 영성과 정념과 싸워 무정념의(apatehia) 의 상태를 이루려고 하는 열심히 우리에게 있었나 하는 물음으로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금의 내 모습을 바라보니 너무도 부끄러웠다. 한국교회의 현실만을 탓할게 아니었다. 종교개혁 이후에 루터가 주장한 <만인제사장>은, 평신도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반대로 목회자들에게는 ‘모두 다 같은 인간인데’라는 타협하는 생각 때문에, 이전에 있었던 목회자의 성스러움이나 거룩함을 잊는데 또한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죄를 짓고도 당당하게 똑같은 인간임을 호소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처음에는 인간적이 면모로 다가올 수 있겠지만, 모두가 바라는 성직자상과는 거리가 있다. 서로가 서로를 용납하는 분위기의 지속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아픔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현실에서 나는 <만인제사장>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가톨릭 종교개혁자인 로욜라의 <Agere contra>를 외치고 싶다. 바로 “거슬러 행하라”는 뜻이다. 본성에 거슬러 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서로가 용납하고 그냥 흘러가는 이 현실을 거슬러 오르라는 것이다. 나는 그 가능성을 사막 교부와 웨슬리에게서 보았다.
여러 가지 영성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진정한 영성을 알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말뿐인 영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성>과 <실천>이 만났던 사막교부와 웨슬리의 영성을 통해서 우리에게도 거룩한 도전이 되길 바란다.
Ⅱ. 사막 교부의 영성
1. 시대적 배경
로마 제국 아래서 박해기를 겪은 후, 마침내 기독교가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313년)에 의하여 공인된 종교가 되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된다. 기나긴 박해가 드디어 끝난 것이다. 이런 변화는 당시의 신자들에게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이었음에 틀림없었지만 동시에 기독교의 정체성에 혼돈을 준 것 또한 사실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기독교인들의 신분 변화와 갑작스러운 기독교 인구의 증가를 들 수 있다. 기독교가 급속도로 대중화되면서 교회는 이전의 소박함과 단순함 그리고 절박함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 권력과 부를 거머쥔 교회는 순수한 초기 신앙을 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앙의 선조들이 보여준 것과 같은 희생과 순교의 영성은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다. 이렇게 흘러가는 현실을 거슬러 오른 사람들이 바로 사막 교부들이었다.
사막 교부들은 대부분 이집트의 광활한 사막에서 생활했다. 사막은 도시의 문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장소로 항상 죽음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으며 모든 문명의 혜택이 차단된 곳이지만, 동시에 세속의 영향을 피하기엔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그들은 사회적 안정과 물질적 부를 모두 거부하기로 오직 그리스도만을 향한 참 신앙을 추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 길을 선택했다. 여러 가지 다뤄야 할 내용이 많겠지만 이번 과제에서는 사막 교부들의 영성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겠다.
2. 사막 교부의 영성
1) 기도 : 기도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라 정의된다. 하나님께로 조정된 삶이 바로 기도인 것이다. 그들의 일반적인 기도의 형태는 어떠한 형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것이었으며 시편을 차례로 암송하면서 밧줄을 꼬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기도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분의 뜻을 깨닫고, 수도자를 성화에 이르게 하는 길이었다. 사막 교부들은 인간이 항상 마귀의 공격으로 악한 생각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 본성은 심히 부패했다는 현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오로지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서만 수도자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치열한 전쟁에서 승리하고 참된 자유와 빛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에바그리스우스는 그 어떤 수도 규칙보다도 기도가 우선임을 강조하면서 “우리에게는 밤새워 일하고 단식하라는 규칙은 없지만,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규칙은 있다라고 말했다. 금언집에는 기도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이나 강조가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고 기도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기도가 그들의 삶 자체였기 때문에 너무도 당연한 것이어서 강조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막 교부들의 노동, 잠, 대화 등 모든 활동 속에서 기도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기도는 곧 그들의 삶이었다.
2) 겸손 : 사막교부들의 금욕주의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낮추며 오직 그분의 은혜에만 의지하는 겸손의 금욕주의였다. 이것은 고된 수행을 거쳐 온갖 시험과 유혹을 이기고 영적으로 높은 경지에 도달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안토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원수가 땅 위에 쳐둔 그물을 보고 탄식하며 말했습니다. : 대체 무엇이 저 그물에서 빠져나갈 수 있으리오? 그러자 한 목소리(겸손이다)라고 내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노인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교만함으로 얻은 승리보다는 겸손함으로 인한 패배를 더 좋아합니다.”
이처럼, 사막 교부는 그들의 수도 생활 속에서 겸손을 실천하고 노력했다.
3) 가난 : 금욕주의는 필연적으로 가난한 삶과 연결된다. 부와 명예, 쾌락과 안락함, 배부름을 추구
하는 것이 원죄 이래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속성인데 금욕주의는 이 모든 것을 의도적으로 부인하기 때문이다. 교부들에게 가난의 삶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가장된 겸손이나 가식이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취해야 할 당연한 도리였다. 다음 이야기는 수도사들이 재물을 소유하는 것에 대해 얼마나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어느 형제가 세상을 버리고 자기의 소유를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으로 쓰기 위해 얼마를 남겨 두었다. 그는 안토니를 만나러 가서 이 사실을 안토니에게 말했는데, 안토니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수도사가 되기를 원한다면 마을로 가서 고기를 조금 사서, 그것을 그대의 벌거벗은 몸에 덮고 돌아오시오.”그 형제는 안토니의 말대로 하고 돌아오는 동안, 개들과 새들이 그의 살을 물고 쪼았다. 그가 돌아온 후, 안토니는 그에게 자기의 충고대로 했는지를 물었다. 그 형제는 상처 난 몸을 보여주었다. 안토니는 그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세상을 버리면서도 자기 자신을 위해 얼마를 남겨두는 사람들은 귀신들의 공격을 받아 이런 식으로 만신창이가 되는 것입니다.”
4) 순종 : 사막 교부들에게 있어 순종하는 것은 겸손의 표현이었으며 자기부정의 모습이었다. 사막
교부들은 하나님의 말씀, 영적 스승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당연시 여겼다. 그래서 히페레키오 교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도자의 보배는 순명입니다. 순명하는 사람은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짐을 볼 것이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곁에서 굳건히 서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서 죽기까지 순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낮은 자는 높아질 것이고 높아진 자는 낮아질 것이라 말씀하셨기 때문에 사막 교부들은 단순성을 가지고 이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고자 애썼던 것이다.
5) 사랑 : 사랑은 사막 교부들의 금욕주의 영성의 시작이자 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의 금욕
주의는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시작되었으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사랑 안에서 그분과 합일을 이루고 성서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명을 성취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어느 날 두 명의 수사가 한 노인을 찾아왔다. 그 노인에게는 매일 식사를 하지 않는 습관이 있었다. 두 수사를 보았을 때 그는 기뻐하며 말했다. “금식에는 상급이 따릅니다. 그러나 남을 대접하기 위해서 식사를 하는 사람은 두 가지 명령을 지키는 셈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의지를 버리며, 사랑의 계명을 성취하게 되기 때문입니다.”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수사들에게 음식을 대접해서 원기를 되찾게 해 주었다.
사막의 수도사들은 이웃사랑이 진정한 영성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안토니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삶과 죽음이 이웃사람에게서 옵니다. 우리의 형제를 얻게 되면 하나님을 얻을 것이며, 우리의 형제를 분노하게 만들면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항하여 죄를 짓는 것입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수도자들은 때로는 친구와 이웃을 위해 중요한 금식을 중단하기도 했다는 것이었다. 이들에게는 금식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의 계명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Ⅲ. 웨슬리의 영성
1. 시대적 배경
웨슬리가 활동하던 18세기 영국에서 유행하던 이신론은 이성으로 종교를 재해석하고 성서의 특수 계시를 부인하며 종교의 보편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17세기에 있었던 종교전쟁과 혁명에 대한 혐오, 유럽 밖의 나라들의 문화와 종교와의 접촉들이 원인이 되어 18세기에 이르러 합리적인 기독교 이해가 고조되어 출현하게 된 것이다. 또한 죄가 너무도 깊이 영국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부도덕한 행위가 정당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회를 바로잡아야 할 교회도 세속에 물들어 버려서 지위가 높은 성직자들은 교회의 사명을 다하기보다는 궁중의 환심을 사고 호의를 얻으려는 일에 열중했다. 사회와 종교의 모습은 흡사 오늘날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시대에 태어난 존 웨슬리는 사회에 흘러 내려가기보다, 사회를 거슬러 올라가는 일을 하게 된다. 다음으로 웨슬리의 영성에 대해 살펴보겠다.
2. 웨슬리의 영성
1) 기도 : 웨슬리가 전적으로 기도생활에 힘쓰게 된 것은 옥스퍼드에서 주님께 헌신하기로 한 이후
만든 홀리 클럽(Holy club)을 통해 거룩한 삶의 실천을 하게 된 때부터이다. 여기서 비롯한 웨슬리의 기도의 영성은 순결한 마음과 단일한 의도로써 하나님의 현준에 모든 초점을 집중시키는 ‘중심 기도’였다. 웨슬리의 기도는 단지 말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침묵 중에 하나님의 현존을 구하면 ‘듣는’것이었다. 그는 회심 다음날 “잠이 깨는 순간, 예수 주여가 내 입에 있었으며, 나는 내 눈을 그에게 계속 고정시키며 내 영혼이 그를 끊임없이 기다리는 데 내 모든 힘이 놓여 있음을 발견했다.”라고 기록한다. 웨슬리는 기도와 삶이 함께 가는 영성을 갖고 있었다.
2) 겸손 : 웨슬리는 인간 영혼의 불완전함을 그의 설교 “인간이 무엇 이관대”에서 말한다. 무한한
하나님의 영원을 통해 인간의 미약함을 드러낸다. 그래서 웨슬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맞출 것을 말한다. 웨슬리는 그의 설교 “자기 부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자기 부인의 성격을 압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행동의 유일한 법칙이 된다는 확신으로부터 우리는 자신의 뜻을 따르는 것을 부인하거나 부인하게 됩니다. 자기부정에 대한 보다 더 깊은 이유는 인간이 타락한 이후 죄의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모든 능력과 기능에 있어서 모두 타락된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영속적이고 보편적인 자기 부인에 대한 깊은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하나님께 곧바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3) 재물의 사용 : 웨슬리는 그의 설교를 통해서 재물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방해가 된다고 말하
고 있다. 웨슬리는 재물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됨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재물의 사용에 대한 법칙을 세운다. 첫 번째는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벌어라이다. 두 번째 법칙은 많이 벌었으면 많이 저축하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많이 저축했으면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것을 주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 재물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할 것을 권고한다. 이 재물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대로 주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벌고 저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청지기적 삶을 통해 다가올 날을 대비하여 선한 일들을 통해 영생을 얻을 것을 설교를 통해서 계속해서 권고하고 있다.
4) 순종 : 웨슬리는 또한 순종을 강조했다. 그는 영적 지도자들의 말씀에 대해 순종하고 복종하여
자신의 뜻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영적 지도자들의 모든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영적 지도자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금하도록 명령받은 것들에 대해 우리에게 행하도록 강요한다면 우리는 이들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삶 속에서 이 일을 자연스럽게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의 혈과 육의 성질과 맞지 않는 고생이나 고통 또는 불편함이 없이, 그리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이러한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순종하는 일이 어느 정도의 고통이나 불편을 수반하기에 바로 육적인 입장에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를 말합니다.
5) 사랑 : 웨슬리는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란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완전한 사랑을 가리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의 설교의 전체적인 취지를 세심하게 검토하는 사람은 누구나 여기서 이야기하는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임을 확신하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오로지 비롯될 수 있는 그런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이어야 함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믿음, 즉, 세상과 자기를 화해시키시기 위해 그리스도로 오신 그 직접적인 증거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Ⅳ. 사막 교부와 웨슬리의 만남
1. Agere contra! 거슬러 행한 사람들
사막 교부와 웨슬리의 영성이 만나는 자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Agere contra, 거슬러 행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사막교부와 웨슬리의 시대는 모두 영성이라는 단어를 꺼내기 어려운 시대였다. 사막 교부들이 살았던 시대는 로마의 박해가 끝나고,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믿음을 지키며 살기가 어려운 시대였다. 웨슬리가 살았던 시대 또한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지만, 도리어 영적인 삶은 메말라 가고 있었다. 모두가 잘못된 것은 알았지만,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았던 그때에 사막 교부와 웨슬리는 과감히 거슬러 행했던 것이다. 끊임없이 무정념(apatehia)의 상태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사막교부는 웨슬리와 꼭 같았다. 누구나 잘못을 지적할 수는 있다. 세상이 많이 부패하고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말을 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렇게 행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사막교부와 웨슬리 모두는 시대를 거스르기로 작정한 사람들임과 동시에, 그렇게 <행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욱 귀한 것이다.
그들의 영성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하게 되는 것이며 완덕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사막 교부들은 그들이 사막 속에서 수도 생활을 하면서 그들의 목적을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두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수도 생활을 시작하는 데 있어 목적은 영혼 구원이었다. 사막 생활 초기 에우프레피오스 교부가 말한 것과 같이 그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들이 구원을 얻을 것인가?”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막 교부들에게 구원이란 단순히 생각으로만 동의하고 믿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구원은 단순히 구속의 의미를 깨닫는 것만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 그리스도를 닮아 완덕에 이르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이는 웨슬리도 마찬가지였다. 웨슬리의 신학의 목적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향하여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는 『완전에 대하여』라는 자신의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예수라고 불리는 그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행하셨으며, 뿌리뿐만 아니라 가지들도 구원하기 위해 행하셨습니다.
웨슬리는 설교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뿌리 즉, 구원과 가지인 성화에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가지의 구원은 궁극적으로 완전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2. 거룩한 운동선수들
이들을 보면 마치 운동선수들이 생각난다. 한 번의 경기를 위해 평생에 걸쳐 절제하고, 훈련하는 운동선수들 말이다. 운동선수들은 경기를 위해서라면 자신이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만나고 싶은 사람들까지도 절제하며 지낸다. 올림픽에 나가는 선수들이라면 아예 태릉선수촌이라는 곳에 들어가 외부와 단절한 채 훈련에만 매진한다. 사막 교부들과 웨슬리가 바로 이러한 거룩한 운동선수들이었다. 그들의 금욕적인 생활을 보면 조금 지나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회개와 통회에 대한 사막 교부의 글을 읽다가 깜짝 놀라게 되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식사의 빈도, 소비된 음식, 음료의 양과 질이 어떠하든지 반드시 포만감을 피하고 약간 배고플 정도로 육체를 지탱하는데 필요한 만큼만 먹어야 한다. “육체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한 만큼이 아니라 육체를 지탱하는데 필요한 만큼 먹는 것”, 이것이 기본 원칙이며 황금률이다. 지나친 고행도 과도한 음식과 음료만큼이나 피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안토니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더니 안토니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그대에게 말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시오. 항상 눈앞에 하나님을 모시며, 어떤 일을 하든지 성서의 증언에 따라 행하며, 어느 곳에 살든지 쉽게 그 곳을 떠나지 마시오. 이 세 가지를 지키면 그대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막교부들은 그리고 웨슬리는 끊임없이 욕망을 누르고 무정념에 상태에 이르도록 훈련, 또 훈련했던 것이다. 사막교부들과 웨슬리가 만나는 자리는 바로 이 훈련의 자리인 것이다.
Ⅴ. 사막교부와 한국교회의 만남
오늘날 현실을 한 마디로 말하라면 혼란과 다툼, 그리고 분열의 시대라 할 수 있겠다. 도덕과 윤리의 가치는 땅에 떨어지고 힘 있는 자들이 질서가 되는 혼란의 시대, 각자의 힘을 가지고 약한 자들을 괴롭히고 싸우는 다툼의 시대, 서로의 입장만을 고수하여 계속해서 나뉘기만 하는 분열의 시대를 겪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교회 내에서도 이러한 일들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특히나 감리교의 분열사태는 회복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암울한 현실 속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외치고 따라갈 수 있을까? 나는 그 답을 사막교부에게서 보았다. 사막교부가 살았던 시대는 우리 시대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종교 지도자들이 세상과 타협하면서 자신들의 안위와 배부름만을 바라는 모습 말이다. 이런 시대에 나는 사막교부와 같은 영성의 훈련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먼저, 기도의 훈련이 필요하다. 기도하지 않고서 우리는 수시로 올라오는 죄와 합리화의 유혹을 이겨낼 힘이 없다. 특히 그리스도의 복음에 충실히 따라 살기 위해 금욕주의적 삶을 택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기도하는 길 외에는 승리의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막교부와 같이 쉬지 않는 기도를 배워야 한다. 바로 삶 자체로 드리는 기도이다.
둘째, 말씀을 묵상하는 훈련이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복음을 삶 속에 그대로 실천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욕망을 제어하는 훈련, 금욕적 영성이다. 1960년대 이후 급속한 경제 성장의 시대를 겪으면서 많은 한국교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욕망을 제어하게 하는 훈련을 시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기는 오류를 범했다. 축복의 영성은 기독교의 영성을 변질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는 동안 기독교의 본질인 사랑과 자기부정, 겸손, 희생,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좇는 영성은 물질의 축복, 출세, 건강, 장수, 교회의 양적 부흥 등의 현세적인 가치에 가려져 점차 희미해져 갔다. 이러한 축복 영성의 결과를 지금 우리의 교회가 고스란히 겪고 있는 것이다.
우리 각자는 이런 사막교부의 금욕주의적인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금욕주의의 훈련은 필수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안토니가 되고 프란치스코가 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기 위하여 가혹한 금욕적 훈련을 마다하지 않았던 그들의 순수한 영성의 본질만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러한 금욕과 절제가 혼자만의 영역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을 향한 사랑과 섬김의 모습으로 전환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공동체이다. 공동체가 교회라고 한다면 각각의 성도들이 이러한 훈련으로 영성의 회복이 일어날 때, 한국 교회는 다시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Ⅵ. 결 론
초대수도원운동 세미나는 나에게 정말 특별한 수업임과 동시에, 귀한 경험이었다. 내 지성을 자극시키는 수업은 많이 들어왔지만, 내 영성을 자극시키는 수업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은 기분이다. 신학교에 처음 들어올 때 했던 다짐들과 드렸던 기도들을 다시 떠올려 보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생겼다. 거룩한 운동선수에 대한 도전과 용기가 생긴 것이다.
올림픽을 위해 땀 흘려 훈련하는 운동선수를 보고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그들의 땀과 눈물을 존중하고, 경기장에서 뛰는 그들을 보며 환호한다. 나는 오늘날 성도들이 바로 거룩한 운동선수들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성도들은 말할 것도 없고 목회자들 중에서도 이러한 거룩한 열심의 모습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깝다. 다른 사람들을 볼 것도 없이 내 모습을 보아도, 내 안에 이러한 열심과 땀과 눈물이 있었는지 반성하게 된다. 올림픽에 나가 열심히 싸우는 운동선수들을 보며 욕하는 사람이 없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거룩한 연습과 훈련들에 매진하며 싸울 때 세상 사람들도 인정하고 존중해 주리라고 생각한다. 사막교부가 그러했고, 웨슬리가 그러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에는 변함없이 변화의 일들이 일어났다. 그리고 회복의 역사들이 일어났다. 오늘 내 삶에서 그러한 변화들을 꿈꿔본다. 회복을 꿈꿔본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고린도전서 9장 24절)
※ 참고문헌
1. 방성규, 『모래와 함께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 (사울 : 이레서원, 2005)
2. 반디.R.C. 저, 『사랑과 기도』, 이후정 역, (서울 : 컨콜디아사, 1994)
3. 베네딕타 와드 저, 『사막교부들의 지혜』, 조영숙 역, (서울 : 은성, 1994)
4. 뤼시앵 레뇨, 『사막교부 이렇게 살았다』, 허성석 역, (서울 : 분도출판사, 2006)
5. 벨라지오와 요한,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요한 실비아 역, (서울 : 분도출판사, 1988)
6. 노로 요시오, 『존 웨슬리의 생애와 사상』, (서울 : 기독교대한감리회 홍보 출판국, 1993)
7. 이후정, 『성화의 길』,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2001)
8. 존 웨슬리, 『웨슬리 설교 선집 3』, 조종남 외 공역,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2006)
9. 존 웨슬리, 『웨슬리 설교 선집 6』
10. 한웅준, “사막교부들의 금욕주의 영성 연구”,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2007)
11. 한성민, “웨슬리와 사막교부 비교 연구”,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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