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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신학 과제

한국기독교 문화운동의 흐름과 전망

by 보통목사 2022.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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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 문화운동의 흐름과 전망

 

1. 들어가는 말

   처음을 찾아가는 것만큼 흥미로운 것도, 또한 두려운 것도 없다. 또한, 현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없이는 처음을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나 또한, 지금까지는 한국의 기독교 문화운동이 어떻게 처음 이루어졌고, 그 흐름들이 지금까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이미 지나간 일이기 때문에, 현재에 나한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덕주 교수님의 수업을 들으면 들을수록, 또한 처음을 찾아가는 작업을 하면 할수록 이러한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뭐든지 그냥 한 번에 ‘뚝딱’하고 만들어진 것이 없다. 어떤 운동에는 분명히 그 운동을 이끄는 ‘선구자’가 있었고, 지금 가지고 있는 물건들은 무수히 많은 변형과 변혁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가 지금 아무렇지 않게 쓰고 있는 샤프나 컴퓨터도 많은 변화와 흐름 속에서 태어난 문화적 산물이라 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역사를 배우면 배울수록 ‘역사는 되풀이된다.’라는 말이 입증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기독교는 인터넷이나 어디를 가도 인정받지 못하고 심지어 “개독교”라는 말을 듣는 실정이다. 세상 보기에도 창피한 일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교회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비일비재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우스갯소리로 어떤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싸우고 있는데 지나가는 중년의 남성이 “여기가 교회도 아닌데 왜 싸우고들 그러시오?”라고 하는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을 씁쓸하게 한다. 이런 현실을 뒤엎고, 변혁시키기 위해서는 이전의 역사에 대해 탐구하고 그 시대 속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 나갔는지 답습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까지의 수업 중 배운 것을 바탕으로 특히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큰 틀로 하여 한국기독교 문화운동의 흐름에 대해 살펴보고 지금의 암울한 현실 가운데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서도 알아보겠다. 

 

2. 몸 말 

 

1) 초기 선교과정에서의 갈등과 수난 

  먼저 내적인 문제로서 선교사들 사이에 조장되었던 갈등관계가 있다. 대체로 초기에 한국에 입국한 선교사들은 교파를 초월하여 협조와 우애의 관계가 유지되었으나, 그 이면에는 선교사 개개인의 독특한 성격차이 등으로 선교사들 간에 갈등과 충돌이 적지 않았다. 1887년 전후한 선교 초기에 선교사 사이에 이와 같은 갈등이 일어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원인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선교사간의 선교관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둘째, 당시 한국의 양분된 정치적 역학 관계와 관련되어 있었다. 셋째, 이들 선교사들 대부분이 20대의 젊은이였다는 데도 한 이유가 있었다. 또 성경을 번역하거나 교리 서적을 발행하는 데에 신의 칭호나 성경 및 교리 용어를 놓고 선교사들 간에 논쟁이 벌어지고 일치점을 찾지 못한 채 갈등을 야기시킨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러한 갈등은 신교와 구교 사이에서도 일어났다. 시간적으로 천주교는 개신교에 비하여 한국 선교의 역사가 1세기나 앞섰으나, 자유스러운 선교활동은 개신교 선교사들의 입국 이후인 1890년대부터였다. 따라서 이때부터 양측 간의 본격적인 선교 경쟁이 시작되었고 그 과정에서 갈등과 충돌, 대립과 반목이 생겨나게 되었다. 천주교 신부는 서양인이라는 여러 가지 이점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선교사들에게 의지하려고 했다. 여러 갈등을 통해 조선인들은 순수한 종교적 고뇌를 통해서 교회와 선교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회적 욕구와 경제적 보호를 받기 위한 안심입명이 입교의 동기였던 것이다. 아무튼 1900년대 한국에서 야기되었던 신·구교 간의 부정적인 관계는 일찍이 서구사회에서 있었던 대립관계를 재현한 감이 없지 않으며 개항 이후 정치 사회적 제반 모순이 내적으로 도출되고 있던 상황을 외면한 채 자파의 편중된 선교활동에 치중한 데서 비롯된 비생산적인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갈등과 수난이 있었던 반면, 자신의 사역을 아주 아름답게 이룬 사람이 있었다. 바로 수업시간에 배운 피도수 선교사라는 분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선교사님은 자신의 이름조차도 한국식으로 

 

바꿔서 부르셨다.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정말 복음을 전하는 데에 다른 것들은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면, 그는 한복을 입었고 예배당 안에는 사찰에서 쓰는 종을 달아 놓았다. 심지어 교회를 사찰과 같이 지었다. 처음에 이러한 것들이 나에게는 거부감으로 다가왔다. 굳이 저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피도수 선교사님과 교인들이 찍은 사진 한 장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복음을 받았고 주님 안에서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실상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도 다른 외형적인 요건, 율법적인 것들에 얽매여서 복음을 전하기도 전에 그들과 싸우고 갈라지는 일이 많지 않은가. 우리는 이러한 갈등과 수난, 또한 이런 갈등과 수난 속에서도 오직 복음을 전하는 데에만 매진했던 한 선교사의 이야기를 보며 어느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과 뜻인지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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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 기독교 초기 신앙공동체 형성 과정 

  한국 개신교의 첫 세례인과 처음 신앙공동체는 우리 민족의 고토 만주에서 탄생되었다. 그리고 그 사건은 성경의 우리말 번역 및 반포 사업과 연관되어 일어났다. 만주에서 첫 한국인 개신교 세례가 베풀어진 것은 1879년의 일이다. 그 해에 백홍준·이응찬과 그들 외 두 명이 세례를 받았다. 이들에게 세례를 베푼 성직자는 당시 만주에서 활약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연합 장로교회 소속 선교사 매킨타이어였다. 한국의 신앙공동체는 한국인들의 주체적 신앙 집회로 시작되었다. 같은 시기에 일본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들이 진행되었다. 그 주역은 이수정이란 양반 계층 학자였다. 하지만 한국인 신앙공동체가 선교사들의 기대만큼 지속적이지 못했다. 그 이유는 도쿄 신앙공동체는 한국 정부에 의해 선발된 ‘귀족’ 자제들이거나 관료 출신들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일본 유학이 정치적 배려에서 이루어졌던 것만큼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나 개종도 정치적 배경에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만주와 일본에서 형성된 한국인 신앙공동체는 국내 신앙공동체 형성의 근거가 되었다. 먼저 언더우드에 의해 조직교회로 창설된 ‘정동 장로교회’가 있다. 또한 아펜젤러에 의해 조직된 ‘정동 감리교회’가 있다. 특히 정동 감리교회는 ‘최씨 부인’이라는 여성 교인을 창립 교인을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이 한국 기독교 초기 신앙공동체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적인 사실은 모두 우리 민족이 주체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외국인 선교사는 방청객의 입장만 하게 하고, 나머지 성서 번역이라든가 공동체의 탄생에서는 주체적으로 우리들이 ‘우리의 것’으로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초기 운동의 주체적 신앙운동은 한국교회 처음 이야기의 예로 들어 설명할 수 있다. 특히 세례명을 우리 고유의 ‘돌림자’로 한다던가, 바늘귀로 의역한 예가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이렇게 복음은 서양에 의해서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이 우리의 것으로, 주체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천주교의 유입 과정 또한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교사에 의한 선교가 아닌, 우리들이 직접 공부하고 연구함으로 받아들여진 것을 배워 알고 있다. 이러한 조상들의 주체성과 독립성, 지금의 우리에게도 필요한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반면, 일본에서의 실패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단순히 ‘귀족’ 층의 사람들로 구성했었을 때에 실패는 지금의 한국 기독교 현실에서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오셨다는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는 다시 한번 새겨야 할 것이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앞서 말한 바가 있다. 지금의 현실도 이와 같은 모습일 것이다. 낮고 천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예수님.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던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모습은, 교회의 모습은 과연 이와 같은가? 최근 우리 교회는 밤 10시가 되면 교회의 모든 문을 잠가버린다. 이유는 밤에 노숙자나 술 취한 사람들이 와서 교회를 더럽힌다는 이유에서이다. 난 그 이유를 들으면서 고개가 갸우뚱했다. 만약 예수님께서 지금 이 순간에 오신다면 어떻게 말씀하실까? 귀족층의 사람들로만 구성되었을 때에 실패했던 일본의 공동체, 오늘날도 일본의 복음의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이때의 실패가 오늘날까지 오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런 역사의 실패를 귀감으로 삼아 어느 특정 계층만을 위한 기독교가 아닌, 모두를 위한 기독교, 모두를 위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이다. 

 

3) 교회의 발전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이라는 외세 간의 투쟁 속에서 불안한 민중들이 목숨과 재산을 지키려는 방도로 교회를 택하였고 그 결과 교인 수의 급증이 이루어졌다. 사실 당시 교회가 이 같은 민중의 도피처로 사용된 예는 여러 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청일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평양의 경우 교회는 피난민 수용소가 되었다. 평양을 점령한 일본군은 교회 재산만은 보호해 주겠노라 약소해 주었다. 교회가 백성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수단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교회가 ‘외국인의 소유’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즉 교회가 치외법권적인 영역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피난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교회는 민중의 피난처가 되었고 그것이 교회 발전의 1차 원인이 되었다. 또한 수난 중에 견고해진 초기 교인들의 신앙, 그들의 지방 전도가 또 다른 교회 발전의 원인이 되었다. 침략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기독교로 들어오게 되었고 이것을 통해 기독교의 유식 계층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힘의 종교’로 인식됨으로써 민중 계층뿐 아니라 민족의식을 지닌 유식 계층도 기독교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즉 기독교를 방편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해 보려는 의도에서 교회를 찾았다는 말이다. 교회는 이처럼 단순한 정치적 보호 기능만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방의 부패한 행정관리의 부정 및 중앙 정부의 잘못된 정책에 대해서도 항의하여 시정케 하는 적극적인 기능도 행사하였다. 독립협회가 창설되어 민족운동을 전개했을 때 지방 지회 활동이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898년 봄 서울에서 독립협회가 주관하는 만민공동회가 열렸을 때 평양에서도 이를 지원하는 집회가 열렸다. 평양의 독립협회 회원이 곧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많은 자료들이 있다. 정부 내 수구세력은 독립협회 관련자들과 개혁세력에 대한 대대적 체포를 단행했다. 1899년 만민공동회를 이끌었던 이승만을 체포한 것을 필두로 1904년 초까지 몇 차례 정치적 사건을 만들어 내면서 개혁파를 제거하려 했다. 이들 정치범들은 도서실에 비치된 기독교 도서들을 읽는 과정에서 기독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다. 정부 고위직에 있었거나 상당한 학식을 갖추고 있던 개혁파 인사들이 개종함으로 유식 계층의 기독교 이해에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은 물론 다른 유식 계층의 기독교 입교를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민중 계층이 주류를 이루었던 한국 기독교에 양반·유식 계층이 참여함으로 신분계층의 다양화를 이루게 되었다. 교회 안에서 두 계층 간의 갈등이 노출되기도 했으나 신앙으로 그 갈등을 극복함으로써 기독교는 총체적 민족 종교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또 이들 양반·유식 계층의 합류로 기독교의 민족의식이 더욱 강화되는 효과를 얻게 되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우리의 기독교가 역사적인 현실 가운데서 결코 외면하거나 피하지 않았다든 것이다. 오히려 역사의 흐름을 주도했고, 민족 간의 단합을 도모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가슴 벅찬 것은 교회의 발전이 곧, 민족의 발전이 되었다는 것이다. 요즘의 현실을 보면 종교가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해 나가지 못하는 모습이다. 이럴 때일수록 예전의 선조들이 어떻게 나라를 위해 적극적인 복음을 펼쳤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3) 교세 확장과 기독교 민족운동(1906~1918년) 

  한국 기독교 수용기에 있어 가장 큰 민족의 과제는 당시 국권침탈의 위기 속에서 민족의 자주독립을 수호하는 것이었다. 1907년 1월 평양에서 시작된 대부흥운동은 이후 전국적으로 파급된 신앙운동으로 한국교회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1903년 원산에서 열린 기도회에서 하디 선교사가 선교사로서의 자신의 무력함을 고백하는 통회의 기도를 하였다. 바로 이것이 부흥운동의 발단이 되었던 것이다. 결실이 없었던 선교의 원인이 자신의 신앙적인 허물, 곧 한국인 앞에 백인으로서의 우월의식과 자만심에 찼던 권위주의에 있었음을 고백하였다. 한 선교사의 고백적인 기도가 발단이 된 이 운동은 그 후 평양 일대와 전국 각지의 부흥운동과 회개운동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대부흥운동의 불길이 점화되었다. 사경 부흥 외 기간에 있었던 회개의 역사는 개인의 내면적 죄만을 고백하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거듭나는 중생의 체험이 그러하듯 사회도덕적으로 이웃에게 피해를 입힌 행위에 대한 깊은 뉘우침과 용서를 비는 실천적인 회개운동도 함께 진행되었다. 예컨대 남에게 신체적, 재정적 손실을 입힌 사람들은 이날의 성령 체험을 계기로 피해 입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손해를 배상하고 사과하는 구체적인 변화의 모습도 적지 않게 나타났다. ‘성령강림’이라는 신비적인 종교체험으로 현현된 이와 같은 부흥운동의 열기는 여성과 학생들에게 전이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런 대부흥 운동의 긍정적인 측면을 살펴보면 첫째, 이 운동을 통해 기독교의 순수한 신앙과 정신이 한국 기독교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둘째, 한국인 신자와 선교사간의 이해 증진에 크게 기여했다. 셋째, 부흥운동이 끼친 또 하나의 영향은 한국교회와 교인의 도덕성 향상에 크게 기여하였다. 끝으로 성경공부와 기도의 열심히 대부흥운동을 계기로 더욱 고양되었다. 결국 이와 같은 열심은 교세의 확장으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역기능적인 부정적 평가 또한 없지 않다. 한국 교회의 비정치화 내지 몰역사성의 문제이다. 이 운동으로 인해 적지 않은 민족지도자급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는 현상이 있었다. 

  화합과 하나 됨으로 인한 놀라운 대부흥의 역사는 지금의 현실을 돌아볼 때에는 조금은 씁쓸할 기분이 없지 않아 있다. 이런 부흥을 체험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의 현실은 분리되고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2명의 감독으로 인한 감리교의 위기, 하지만 이것은 감리교의 실패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이미 역사가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인종,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자라온 사람들조차 화합하고 하나 되었을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지금의 현실을 보며 낙담할 것이 아니라 더 크게 역사하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봐야 할 것이다. 

 

4) 국권 상실과 기독교의 항일운동

  국군 상실에 맞서 무장투쟁운동을 전개했는데, 여기서 무장투쟁이란 1910년대를 전후하여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테러와 암살 등의 방법으로 진행된 항일 무장투쟁 운동을 의미한다. 한국교회의 성립과 발전 과정은 개항 이후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해 가는 시기와 동시에 병존함으로써 한국의 기독교는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는 민족종교로서의 위상을 정립하는 한편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대응 이데올로기로서의 기능이 부여될 수 있었다. 항일 무장투쟁운동에 가담했던 기독교인은 대체로 정치·사회적 추이에 민감한 서울과 서북계 출신 그리고 해외에 망명 중이던 신지식인 계층이 그 구성체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본격적인 기독교인의 무장투쟁의 예로는 1905년 전덕기·정순만 등이 박제순 등 ‘을사오적’을 처단키 위해 평안도 장사들을 모집, 암살을 계획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일부 기독교인들의 실천적 항일 저항운동은 그 후 국내외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경의 일이었다. 일본의 ‘조선 병합’에 대한 러시아의 양해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러시아 순방을 마치고 귀국 도중 하르빈역에 하차하는 이토오를 향해 안중근은 4발을 쏘아 그 자리에서 이토오를 쓰러뜨렸다. 안중근의 이러한 행동은 1940년대 독일의 나치 정권하에서 고백교회를 주도하다 마침내 “술 취한 운전사에게 운전을 맡김은 우리 모두의 죄악이다”는 신학적 입장을 취하고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한 본회퍼를 연상케 한다. 기독교의 기본 정신에서 볼 때 살인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겠으나 한편 더 큰 살인 행위를 막기 위한 살해행위에 대한 정당성 문제도 고려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의 이토오 살해에 대한 신념이 기독교의 정의와 평화 정신에 입각한 행위였다는 점이다. 우선 이토오의 살해 계획을 세운 이후 그는 이 일을 놓고 항시 기도하였다. 그는 이토오를 살해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합치하는 것으로 믿고 하나님의 가호를 간구한 가운데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또한 항일 경제운동도 적극적으로 벌였다. 일본 상품의 불매운동도 조직적으로 진행되었는데 한국 상인들로 조직된 상회나 상업회의소를 중심으로 추진된 일본 상품 불매운동은 집단적으로 행해져 회원 중 이를 위반할 시에는 징계를 가하기도 하였으며, 이에 대한 정부의 압력이 가해질 때는 집단 철시 등의 실력행사로 대응하기도 하였다. 1900년대 전개된 또 하나의 기독교계의 항일 민족경제운동으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익히 잘 알려져 있는 국채보상운동이다. 이 운동은 1907년 2월 대구에 있던 출판사 광문 회의 사장 김광제와 부사장 서상돈 등을 중심으로 발족한 국채 보상기 성회가 모체가 되었다. 이 운동은 곧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 등이 적극 홍보함으로써 일종의 민족운동적인 차원에서 전국적으로 추진되어 범국민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우리는 이 장을 통하여서 민족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던 교회의 모습을 보았다. 역시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이덕주 교수님도 학교를 다니는 중에는 구치소도 다녀오고 여러 데모에도 

 

참가했다고 하셨다. 서대문 경찰서는 감리교신학대학교 하면 치를 떨었다고 한다. 그것이 폭력적이라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진정 그 외침이 예수님의 외침이었다면, 진정한 예언자의 소리였다면 우리는 그 소리와 외침을 다시 한번 내야 할 것이다. 

 

5) 3·1 운동과 기독교 

  3·1 운동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이후 이에 호응한 각계각층의 참여로 거의 1년간 지속된 거족적인 항일 민족독립운동을 총칭하는 것이다. 3·1 운동에서 기독교, 천도교 등 종교계가 대거 참여하여 주도한 데는, 당시의 유일한 조직체가 종교계뿐이었으며 종교계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신앙공동체의 특성 이외에 일제의 이러한 종교탄압 정책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탄압과 박해 속에서도 교회는 성장하고 조직화되어갔다. 3·1 운동에 참여한 수많은 지도자들이 교계에서 배출된 것은 이러한 한국교회의 박해 속에서의 성장을 반영하는 것이다. 독립선언 장소는 파고다 공원으로 결정되었으나, 예기치 않은 폭력사태나 일제 군경의 교란을 우려한 박희도의 제의에 따라 하루 전에 태화관으로 변경하였다. 학생·시민들은 독립만세 시위에 돌입하였다. 민족대표들은 통보를 받고 출동한 일제 경찰에 자진 체포되었다. 급격히 전국적으로 확산된 시위는 초기에는 기독교와 천도교 세력이 강한 지역에서부터 시작되어 3월 중순경까지는 전국적으로 파급되었다. 시위양태도 초기에는 독립선언서 격문 배포, 집회, 만세시위 행진 등 평화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었으나, 군대를 동원한 일제의 폭력적 유혈 탄압에 맞서, 헌병·경찰·군청·면사무소·우편국 등 식민통치의 말단 기관들을 습격, 파괴하는 등 폭력적 시위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3·1운동에서 기독교는 여타 어느 종교보다도 큰 역할을 감당하였다.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민중 운동화 단계에서도 교회는 전국의 조직과 지도자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사실 기독교의 조직이나 적극적인 참여가 없었더라면 3·1 운동이 그처럼 신속히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오랫동안 지속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일제 헌병대가 조사한 1919년 말까지 3·1 운동 관계 피검자 종교별 상황에 따르면 기독교인이 가장 많아 3,426명으로 비종교인까지 포함한 총 피검자 19,525명의 17.6%를 차지하고 있다. 3·1 운동 이후 기독교의 대표적인 신앙 양태를 두 가지 흐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째가 초월적 신비주의 신앙운동이고, 둘째가 현실적 계몽주의 신앙운동이다. 전자는 김익두·길선주·용도 등 주로 부흥 운동가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교회 내의 민중 성향을 지닌 교인들이 주체를 이루었다. 기적과 이적을 동반한 열광적 부흥운동은 3·1 운동 직후의 패배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창출된 신앙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초월적 신비주의 신앙운동은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재림 및 종말신앙으로 발전되었는데 한국 기독교인들의 현실 도피적인 내세 신앙이 정착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는 다른 방향에서 일제의 한국 지배라는 현실을 극복해 보려는 현실적 시도로 나타난 것이 계몽주의 신앙 양태라 하겠다. 3·1 운동을 체험한 기독교 지성인 및 지도급 인사들 중 상당수는 3·1 운동 실패의 원인을 민족의 독립 역량 부족으로 인식하고 적극적인 항일투쟁보다는 민족계몽운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 역량을 향상한다는 취지 하에 계몽주의 노선을 택하였다. 1920~30년대 기독교에서 농촌계몽운동, 문맹퇴치 운동, 절제운동, 야학운동, 문서 운동, 여성 계몽운동 등을 적극 추진하게 되는 이론적 근거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6) 교회의 내적 갈등과 분규 현상 

   1920년대 후반에 나타나기 시작한 한국 기독교의 위기 상황 정리. 초기 한국 기독교인들이 보여 주었던 주체적 복음 수용과 전파로 한국교회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하였다. 그 같은 주체적 복음 수용은 초기 한국 기독교인들이 문서 활동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확인되고 있다. 탁사 최병헌은 “한국 최초의 신학자인 동시에 종교학자의 명예”를 얻을 만큼 초기 한국 기독교 신학운동을 주도하였다. 최병헌은 “종교의 진리는 천상천하에 하나이오 고왕금래에 둘이 없는 것이다”라는 전제하에 타 종교에 대해 결코 배타적이거나 독선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종교가 하나로 성취된 바’가 그리스도 복음이며 기독교라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 같은 최병헌의 종교신학적 입정은 이미 기존의 동양종교들이 자리 잡고 있던 한국의 종교문화적 풍토 속에서 새로운 종교로 이식된 기독교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려는 초기 

 

한국 기독교 지식인들의 의식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해석과정을 거쳐 동양의 종교문화적 풍토에 익숙해 있던 한국인들은 문화적 충격을 덜 겪으면서 기독교로 개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초기 한국인들의 타 종교 이해는 일부 보수주의 선교사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어서 '파괴적이고 독선적인 태도‘와는 분명히 달랐다. 선교사들의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몰이해 현상은 제2세대 선교사들이 들어오는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더욱 두드러져, 미국 본토의 ’ 서구식 기독교‘를 한국에 이식하려는 선교사들과 한국적 문화 풍토에 맞는 ’ 토착 기독교‘를 수립하려는 의식 있는 한국인들 사이에 갈등과 마찰이 빚어질 수밖에 없었다. 여러 신학적 강등 요인이 지방색, 교권 장악 등의 외부적 갈등요인과 연결되면서 1920~30년대 각종 교회 분규 사건들이 일어났다. 특히 선교사들에 의해 보수주의 신학 분위기로 정착되었던 장로교회에서는 외국 유학을 하고 돌아온 신진 한국인 신학자들에 의해 유입된 진보주의적 신학을 창조적으로 흡수·조화시키지 못하여 일어난 사건들이 많았다.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전반에 이르는 시기의 한국교회는 신학적 갈등이라는 내적 대립 현상이 첨예하게 드러났고 이와 관련되어 교파 간 갈등의 여러 징후들이 나타났다. 여러 교파 간의 갈등의 사건들은 '하나된 교회'를 추구했던 초기 한국 기독교 정신을 크게 훼손시켰다. 그리스도 안의 일치를 추구해야 할 교회가 교리와 이권에 대여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형태를 보이게 된 것이다. '교파 신학'으로 훈련받은 '교파 교회'가 갖는 치명적 약점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부정적 현상들은 교회연합운동의 방해 요소로 작용되었음은 물론이다. 결국 이러한 갈등은 오늘날의 수많은 교파를 만들어 냈다. 

  이 장을 쓰면서 참 마음이 많이 아팠다. 인간적인 신학적 차이 때문에, 혹은 감정싸움 때문에 하나이신 그리스도께서 둘로, 셋으로 나누어지는 과정은 나의 마음을 어렵게 했다. 꼭 지금의 현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아 보여서 마음이 아팠다. 어떻게 해서 갈라지게 됐는가? 결국은 자신의 소리를 내고, 자신이 옳다고만 주장했기 때문에 둘 혹은 셋으로 나누어지게 된 것이다. 보수와 진보, 기독교는 이것을 넘어 제3의 것을 주장해야 한다. 모든 것을 포함하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말이다. 

 

6) ‘다름에도 불구하고 조화’

   우리는 총 5가지로 나누어서 한국 기독교문화운동사의 대략적인 흐름에 대해 살펴보았다. 워낙 내용이 방대한지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몇 가지의 큰 틀을 기준으로 삼았다. 내용이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꼭 알고 넘어가야 할 것들은 담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여기서 다루어야 할 것은 과연 이후의 기독교문화운동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과제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조화’라고 할 수 있다. 역설적인 말이 될 수도 있지만, 본래 예수그리스도의 모든 말씀과 그의 삶도 역설적이었다는 점을 말해주고 싶다. 난 개인적으로 ‘~에도 불구하고’라는 접속어를 참 좋아한다. 그 단어 속에는 너무나도 많은 도전과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다. 앞서 역사를 살펴보았듯이 서양에서 들어온 기독교 자체는 우리와는 다를 수밖에 없는 조건들을 너무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서로 다른 생활습관과 문화, 그리고 기후, 옷, 풍속, 우리와 비슷한 점을 찾기 힘들 정도로 우리와는 많이 다르다. 이런 판이하게 다른 기독교문화가 우리나라에 정착되기까지 아픔과 화해, 부흥은 앞서 역사를 통해 알아보았다. 우리의 미래의 흐름은 바로 이런 모습을 닮아가야 할 것이다. 앞서 좋은 예로 피도수 선교사님의 이야기나, 토착화시킨 신앙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다름을 조화로 이루는 것만이 우리 기독교문화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내가 또 하나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다름’이라는 단어인데 다름은 틀림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문화와 서양의 문화가 다를 수는 있지만 둘 중에 하나 어떤 것도 틀리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들 중에 하나이다. 맨 처음 서양 선교사와 우리 조상들과의 갈등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런 보이지 않는 문화의 우월감은 우리를 나뉘게 한다. 내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조화’를 주장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이런 보이지 않는 우월감이 있을 때에는 서로가 하나가 되지 못한다. 사회도 종교도 민족도 말이다. 지금의 기독교 현실을 보면 우리는 너무도 세상과 ‘다르’ 게 살아가고 있다. 세상 또한 우리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고, 우리 또한 세상

 

에 대한 소리에 귀를 닫은 지 오래이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이제 닫은 귀를 열고 세상과 함께 조화되어야 할 것이다. 오래전 사도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지향해 나가야 할 방향은 틀림이 아닌 다름을 이해하고 조화를 이루어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3. 나가는 말 

   지금까지 한국기독교문화운동사의 흐름과 앞으로의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전체적인 흐름을 잡는 데에는 지면의 한정 때문에 하지는 못하였지만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토대로 알아보았다. 한 학기 동안 이덕주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며 배운 가장 큰 깨달음이 있다면, 바로 과거를 통해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역사는 흘러간 것에 불과하며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아무런 해답도 내줄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번 수업을 들으면서 느낀 것은 과거의 역사가 계속 되풀이된다는 것이다. 과거에 행했던 다툼과 화해와 전쟁과 여러 가지 갈등으로 인한 싸움들이 현재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들어가는 말에서도 언급했듯이 지금의 기독교 현실은 갈등과 싸음으로 인한 나눔의 시기이다. 서로의 소리를 듣지 않고, 자신들의 소리만 내는 실정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대해 우리가 실망하거나 낙담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로 과거에도 이러한 상황이 똑같이 있었고 또한 극복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있었지만 그 어려운 상황을 실학이라는 이데올로기로 극복했고, 로마 가톨릭의 부패함을 종교개혁으로 새롭게 바꾼 것, 그리고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고백하고 이스라엘이 더욱 하나님의 사역에 쓰임 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내가 제시했던 ‘다름에도 불구하고 조화’를 이룰 때에 우리에겐 소망이 있고 비전이 있다. 

 

<참고도서>

- 기독교문사, 한국 기독교의 역사Ⅰ

- 기독교문사, 한국 기독교의 역사Ⅱ

- 이덕주, 종로 선교 이야기 

- 이덕주, 개화와 선교의 요람 정동이야기

- 이덕주, 한국 토착교회 형성사 연구

- 이덕주, 초기한국 기독교사 연구

- 이덕주, 한국교회 처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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