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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신학 과제

신약 이해 기말고사

by 보통목사 2022.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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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이해 기말고사 


1.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4가지 견해에 대해 설명하고 자신의 입장을 밝히시오.

 

J kallas 요한 계시록 : 번역본 있음 참조

1) The 'End of History' View : 역사의 마지막을 서술한 책이다. 한 가지 Topic에 관심을 가진다. 세상 종말에 대한 주장. 개인 신앙생활이나 박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역사의 마지막 현상만 서술한 것이다.  

2) The 'All of History' View : 역사의 마지막이라는 것 인정, 그러나 마지막뿐만 아니라 예수가 이 땅에 오  시고 난 후부터 역사의 마지막까지 이 시대 모든 것을 포함한다. Time Table 역사의 계산자 요한계시록 1장

3) A.D.30~인간의 끝 16장의 해석 : 이 세상에는 정의가 없고 대 재난이 터지고 악마의 권세가 득세하고... 과거사에서 어느 시점인가? 히틀러로 볼 때에 마지막 22장은 2040년이 된다. 

4) The 'Above History' View : 역사를 초월한다. 일반적인 삶의 진리를 이야기한다 선이 악을 이긴다는 것 1,2번은 틀렸다는 견해이다

5) The 'In That History' view : 영원한 진리를 말한 것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을 읽었던 처음 사람들을 위해 쓰인 책이다.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 사람들의 상황과 문제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우리의 시야를 바로 그곳에 돌려야 한다. 바라봐야 한다. 

 

2. 누가-행전의 기록시기에 관한 학자들의 견해에 대해 서술하시오.  

1) 60년대 중반(바울이 로마의 한 가정집에 연금되기 이전, 혹은 그 후 몇 년 안에 기록된 것으로 간주) 

-사도행전에서 바울의 가이샤 앞에서의 재판, 석방, 그리고 그의 죽음에 대한 어떤 언급도 찾아볼 수 없다. 

-사도행전에는 64년 네로의 박해에 대해서 아무런 암시도 없다. 

-기록 목적 중 하나가 기독교가 로마의 공인 종교임을 보여주기 위한 시도라면 네로의 박해 하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작품에 나타난 유대 기독교인, 바리새인/사두개인들이 접촉하는 성전과 회당의 묘사는 30/40년대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묘사처럼 여전히 서정적이다.

-바울에 대한 누가의 묘사는 여전히 환희와 평화이다.(바울의 순교 전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복음서와 사도행전 사이에 문학적 병행은 예수의 수난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바울 죽음 이전에 쓰인 것을 말해줌) But, 마가의 기록시기는 65년 이후인데 누가가 62/63년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두 자료설에 맞지 않는다. 

 

2) 100-130년대로 추정

-누가에만 나오는 사건들이 요세푸스와 병행을 이룬다. 37/8년부터 100년까지 살았던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안의 보호와 후원을 받으며 네 권의 저서를 남겼다. 『유대전쟁사』(75-79), 『고대사』(93/4); 『생애』와 『아피온에 반대하여』(100년경). 누가와 요세푸스의 병행(구레뇨가 주도한 인구조사, 갈릴리 사람 유다, 드다, 이집트 예언자, 헌정 등)을 고려하여볼 때 만약 누가가 요세푸스를 읽었다면 이러한 후기 기록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But, 마사다에 없었던 요세푸스가 그것의 기록에 대해 정확했던 것을 고려해보면 요세푸스와의 공동자료는 동일한 전승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

 

3) 마태와 유사하게 80년대로 추정 

-마가복음에 의존 : 70년경에 마가복음이 쓰인 후에, 누가복음은 75년 이후에 기록되었을 것이다라고 주장.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지식을 반영하고 있다.(13:34-35, 19:41-44, 21:20-24)

 

※ 바울의 편지는 명백히 1세기 말경에 기독교 교회들 안에서 순환되었다는 점, 누가는 마태복음을 알고        있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는 점으로 인하여 대부분의 학자들은 누가-행전은 마태와 동일한 시기인 80-90년 사이에 기록되었다고 본다. 

 

3. 마태복음의 구조에 대한 이론 중에서 오경 구조와 기독론적 구조에 대해 설명하시오. 

1) 오경구조 : 베이콘은 마태에 나타나고 있는 종결 어구에 관심을 쏟았다. 예수께서 설교를 마칠 때나다 마태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라는 어구를 사용한다. 이러한 종결 어구가 마태에 다섯 번 나타나고 있다. 이것에 관심을 집중하면서 베이콘은 마태가 모세오경을 염두에 두고 마태복음 구조를 다섯 권의 설교로 구성하기를 원했다고 주장한다.                      

 

서론 : 유아 설화(1-2장) / 1권 제자직(3-7장) / 2권 사도직(8-10장) / 3권 계시의 감추임(11-13장) / 4권 교회 치리(14-18장) / 5권 심판(19-25장) / 결론 수난과 부활(26-28장)

But,

(1) 그는 1-2장의 유아 설화와 26-28장의 수난과 부활기사를 오경 구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배제하였다. 

(2) 종결 어구라고 주장하는 구절들은 한 설화가 끝난 후에 다음 부분으로 독자들을 이끄는 기술적인 설명으로 보인다. 

(3) 마태가 예수를 ‘새로운 모세’로 묘사하기를 원했다고 하지만 마태 안에서 그것에 대한 실제적인 증거를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이런 약점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래전에 발표된 베이콘의 이론은 마태의 구조를 이해함에 있어서 가장 매력적인 제안이다. 

 

2) 기독론적 구조(The Tripartite Division) : 킹스베리는 4:17과 6:21의 “예수께서 이때로부터.... 시작하셨다”는 구를 중요시한다. 

1:1-4:16 메시아 예수의 사역 이전의 사건들 / 인격

4:17-16:20 메시야 예수의 갈릴리에서의 사역 / 그리고 배척

16:21-28:20 메시야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But,

(1)“예수께서 이때로부터..... 시작하셨다”는 구는 마태복음에서는 이야기의 시간에 대한 변이를 발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마태에서 중요한 구조를 위한 고안으로 보이지 않는다.

(2) 두 번 나타나는 구는 마태의 중요한 구조를 위한 고안으로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26:16에도 비슷한 어구가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그때부터” 유다가 예수를 남겨줄 기회를 찾고 있음을 묘사한다. 

(3) 1:1의 ‘세계’란 말이 1:2-4:16의 전체 제목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1:1의 세계란 용어로부터 예수의 인격이란 주제를 찾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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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마가복음에서 논의되고 있는 “메시아 비밀”(the Messianic Secret) 에 대해 설명하시오.

-1901년 브레데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예수께서 사탄에게 ‘잠잠하라’고 명령하시고, 고침 받은 자들에게도 침묵하라고 명령하신 것, 제자들에게도 자신의 정체성을 폭로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마가를 연구하는 현대 학자들은 이러한 명령들은 실제적으로 비밀을 지키라는 예수의 명령이기보다는 마가의 문학적인, 그리고 신학적인 관심에 따른 것이라고 확신한다. 브레데에게 있어서, 마가의 기독론은 초기 기독교 안에 자리를 잡게 된 두 개의 기독론에 대한 해결로서 제시되었다. 그는 가장 초기의 전승은 그의 부활에 의해서 예수가 메시아가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주장이라고 믿었다. 이와 같이, 기독교인들이 예배하였던 부활한 주 예수는 부활 이전에 그렇지 않았던 즉, 팔레스타인에서 살면서 가르쳤던 예수와 동일시되었다. 다른 복음서 기자와는 달리 마가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누구인가를 알고 여전히 살아있었던 때에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한다. 마가는 메시아로서의 예수의 삶을 묘사하기 원했다. ‘비밀 주제’는 어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처럼 명백해 보였던 것을 왜 알지 못하였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고안이었다. 만약 어떤 이가, “나는 거기 있었지만 나는 예수가 모든 이러한 이적들을 행하거나 혹은 메시아가 될 것을 주장하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한다”라고 말한다면 마가는 “그는 이러한 것들을 말하였고 행하였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들에 관하여 알 권한을 지닌 자들 중의 하나가 아니었다.”라고 말할 것이다. 

 

5. 요한복음에 나타난 반-베드로적 경향성(Anti-Petrinism tendency)에 대해 설명하시오.

-요한복음 저자가 베드로를, 사랑하는 제자에 비해서 부정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요한 공동체에는 베드로가 아닌 사랑하는 제자가 가장 중요한 그리고 가장 권위 있는 지도자임을 나타내려고 했다는 주장이다. 

 

(1) 요한복음에서는 베드로가 마 10:2에서처럼 예수의 “첫 번째” 제자가 아니며, 또한 공관복음에서처럼 맨 처음으로 예수의 부름을 받음 제자도 아니다. 오히려 요한복음에서는 안드레가 맨 처음 예수의 제자가 된 사람이며, 베드로는 안드레의 인도로 예수 앞에 나온 사람이다. 

 

(2) 공관복음에 다 나오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있었던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나오지 않는다. 요한복음이 이 기록을 생략한 것은 분명히 그의 중요성을 부각하지 않으려는 의도 때문인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 내용에 해당되는 것들은 안드레나 나다나엘에 의해서 이미 고백되어 지고 있다. 

 

(3) 예수의 마지막 만찬 석상에서 예수와 가장 가까이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던”(13:23) 제자는 베드로가 아니라 “사랑하는 제자”였다.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품에 있었던 것이 예수인 것처럼 여기서 사랑하는 제자가 예수의 품에 있는 것(B.D) 이다. 또한, 예수가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을 하셨을 때, 베드로는 더 이상 다른 복음서에서와 같이 제자들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한 채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를 사랑하는 제자들 통해서, 그의 중재를 통해서 예수에게 질문하고 있을 뿐이다. 

 

(4) 예수가 체포되어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갈 때 오직 두 사람의 제자만이 그의 뒤를 따랐는데 “다른 제자” 곧 사랑하는 제자는 대제사장과 안면이 있어 그대로 들어갔지만 베드로는 문 앞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있을 때 사랑하는 제자가 다시 “나와 문지기 소년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들여보내 주고 있다. 사랑하는 제자에 비해 베드로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격하되어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여 제자직에 실패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 반면에 다른 제자는 같은 곳에 있었으면서도 베드로처럼 실패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5) 예수의 처형 현장에 베드로는 도망간 채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데, 사랑하는 제자는 예수의 모친과 함께 마지막 임종을 지키고 있고, 그 자리에서 예수는 자신의 모친을 사랑하는 제자에게 맡긴다. 

 

(6)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새벽에 무덤이 비어있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사랑하는 제자가 함께 무덤을 향해 달려갔는데, 사랑하는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도착했다고 쓰여있다. 여기서도 베드로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종속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을 수 있다. 부활 현장의 첫 목격자가 사랑하는 제자이며 부활 신앙에 이르렀던 첫 번째 제자가 사랑하는 제자임을 강조한다. 

 

(7) 요 21장에서 부활하신 예수가, 디베랴 바다에서 고기잡이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오직 사랑하는 제자가 예수를 알아보고 “저분은 주님이시다”라고 말했고, 베드로는 그 소리를 듣고 놀라 벗었던 몸에 겉옷을 두르고 배에서 뛰어내렸다. 여기서도 영적 주도권이 베드로에 비해 강조되고 있다. 

 

(8)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가 체포될 때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검으로 쳐서 떨어뜨린 제자가 베드로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 이름을 밝힌 이유는 “저자가 다시금 베드로는 예수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가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그의 어리석음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7. 요한의 공동체 역사에 대해 서술하시오. 

(1) 세컨 그룹이 들어오면서 그룹 간의 신학적 갈등이 생겼다. 유대인들과 논쟁을 벌이게끔 한 촉매 역할이 되었다, 유대인들과 유대인들의 유일신 사상을 버리겠다고 하는 요한공동체와 논쟁을 버린다. 유대 지도자들은 요한의 공동체를 회당에서 쫓아냈다. 요한 공동체는 예수를 세컨드 갓으로 생각했다. 백성에게 소외당했던 요한공동체는 유대인들을 악마나 사탄의 자녀로 간주했다. 예수 안에서 종말론적 약속 성취를 강조했다. 그들이 유대인들 안에 있었던 것을 상실했던 것에 대한 보상으로. B.D(Beloved Disciple)가 나타났다.

 

(2) 조금 지나다 보니깐 이방 개종자들이 이 그룹에 들어온다. 이때 요한복음서가 나온다. 유대인들은 눈이 멀었기 때문에, 헬라 사람들이 들어온 것은 하나님의 구원 성취의 계획이라고 생각한다. 이방인이 들어옴으로 인해서 공동체는 팔레스타인에서부터 디아스포라로 옮기게 된다. 헬라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방 지역으로 옮기니깐 이방 사람들과의 접촉은 요한 사상에서의 보편적 상상력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거부와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요한의 공동체를 더욱 확신시켰다. 세상이 예수를 적대시했고, 그들이 바로 자기 자신들은 사탄의 권세 하에 있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확신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유대 기독교인들에 의한 요한의 고등 기독론의 거부는 불신으로 보였다. 그리고 교제의 단절을 가져왔다. 서로 교통은 정통교회들에게는 기독론의 차이와 교회 구조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치를 위한 희망을 가짐으로써 열려있었다. 유대 기독교인들과의 대립적 관계에서 기독론에 대한 방어적 집중은 요한의 공동체 내부에서도 단절을 가져왔다. 

 

(3) 요한 1,2,3서의 상황 : 우파 - 서신에 나타난 추종자들 :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고백을 해야 하는데, 예수가 육으로 오셨다고 하는 사실을 고백해야 한다. 그리고, 그의 계명을 지켜야만 된다. 분리주의자들은 악마 사탄의 자녀들이고 적그리스도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은 인간 교사들의 요구사항을 회피해야 한다. 진정으로 영을 가지고 있는 모든 자들을 시험해야 한다. (떨어져 나간 자들은 전부 자신이 영을 받았다고 하며 나갔다. 그런 사람들을 시험하라.) 좌파 - 위에서 오신 그분은 신이기 때문에 그는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없다. 그는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니다. 지상에서의 삶이나, 신자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구속적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왔다고 하는 지식이 이것을 믿는 사람은 이미 구원을 받았다. (영지주의 냄새가 난다.)

 

(4) 서신 이후(2세기 이후) : 우파 - 공교회와 결합했다. 분리주의자들과 싸울 수 없었다. 그들의 적대자들을 누를 수 없기 때문에 저자의 추종자들의 어떤 이들은 권위 있는 공식적인 교사들의 요구를 수용했다. 동시에 공교회에서 요한의 고등 기독론에 대해서 열린 자세를 가졌다. 점차적인 병합이 있었다. 아주 천천히. 공교회로 수용되고 있었는데, 이 요한복음이 영지주의자들에 의해서 사용되고 있었다. 

좌파 - 영지주의 쪽으로 갔다. 큰 무리들은 분리주의자들의 신학을 수용한 것처럼 보인다. 분리를 통한 온건주의자들로부터 단절하면서 극단주의로 나갔다. 가연설(예수께서는 단지 인간으로 보였다.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 쪽으로 가버렸다. 영지주의 쪽으로 가버렸다. 열광주의 쪽으로 빠졌다.(자신들이 성령이다.) 그들도 요한복음을 가지고 있었다. 

 

step 2

객관적으로 요한복음과 요한 계시록을 나란히 두고 본다면, 동일한 저자라고 생각할 수 없다.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모국어로서 헬라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저자는 유려한 헬라어를 사용하였다. 또한 사상적인 문제, 사회적인 분위기(박해<->내부의 갈등, 공동체의 분열)등 대부분 다르다. 요한 1서, 2서 3서까지 요한의 문서로 간주하지만, 요한계시록은 따로 떼어내어 생각한다. 

 

johannine literature - 요한복음, 1.2.3 서신

 

요한복음과 1.2.3서를 한 공동체의 산물로 생각한다면, 공동체 내부의 문제들과, 역사를 추정할 수 있다.  

 

첫째 국면 -기원 (50년대 중반 - 80년대 말) 

(원래 그룹)팔레스타인 근방에서 세례 요한의 추종자를 포함한 보편적 기대를 가진 유대인들이 예수를 받아들였습니다. 다윗의 자손, 메시아,  예언자로서.  이적에 의해서 확증된 자로서.   이 그룹 안에 한 사람(BD)이 있었습니다. 예수의 사역기간에 예수를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이 사랑하는 제자입니다. 

                               ↓

<--(두 번째 그룹) 예수를 믿었던 반 성정적 경향을 가진 유대인들이 가입했다. 사마리아에서 개종자를 얻었던. 그들은 예수를 다윗계통의 메시아가 아니라 모세의 계통의 메시아, 선지자로 이해했다. 바로 예수는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보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내려온 자로 믿어졌습니다. 

                               ↓

high christalogy 로의 전환

두 번째 그룹의 합류는 촉매 역할을 했다. 고등기독론, 선재기독론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그래서 이런 고등기독론은 유대인들과 논쟁을 하도록 만들었다.  유대인들은 요한 공동체가 예수에게서 제2의 하나님을 발견함을 통해서 유대의 유일신  사상을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궁극적으로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은 요한 공동체를 회당으로부터 제외시켰다. 요한공동체는 유대인들을  사탄의 자녀로 간주하였다.  이 사람들은 그들이 유대교로부터, 사회로부터 잃어버린 것들의 대가로 예수 안에서 종말론적인 성취를 강조하였다. ,,   사랑하는 제자은 이런 역할을 하였다.

                                       ↓

<- 이방인 개종자들

                                       ↓

두 번째 국면- 복음서의 등장 (90년대)

유대인들이 눈이 먼 이후로, 요한 공동체는 이방인의 개종을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로 믿었다. 이방인이 들어옴으로 인해 공동체는 디아스포라로, 팔레스타인을 벗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연결은 요한의 사상에서의 보편적 가능성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타인들의 거부와 유대인들에 의한 박해는 요한 공동체를 확신시켰습니다. 이 세상이 예수를 적대시하고 거부했고, 자신들은 사탄의 소유가 아님을.  유대 기독교인들에 의한 요한공동체의 고등기독론은 불신과 교제의 단절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기독론의 차이와 교회론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치에 대한 희망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한 정통교회, 즉 사도적 교회와는 오히려 열려있었습니다.  

                                        ↓

기독론에 대한 유대인들과 유대 기독교인들의 방어적인 집중은 요한 공동체 내부에서도 단절을 가져오게 되었다.

 

셋째 국면  - 서신 (100년)   ↓                            ↓↓

-> 서신의 추종자들 - 예수가 육으로 오셨고, 그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함. 분리주의자들은 악마의 자녀들, 적그리스도들, 영과 자기가 하나로 생각함. 영을 시험해야 함

=> 분리주의자들 - 위에서 오신 그분은 신이기 때문에 그는 완전한 인간일 수가 없다.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니며, 지상에서의 삶과 신자의 삶은 구원적 의미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 지식을 중시함.    그리고 이것을 믿는 사람은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넷째 국면 - 사도 이후 시대 (2세기)

서신의 추종자 - 정통교회(공교회)와 결합. 전승에 호소함으로써 분리주의자들과 싸우기 위해서, 권위 있는 공식적 교사들에 의지했다. 동시에 공교회에서 요한의 고등기독론에 대해서 우연스럽게 열려있었다. 그래서 점차적인 연합이 있었고, 공교회에서 이 두 공동체의 결합이 가능했다.  요한복음이 영지주의에서 잘못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사용되었지만, 결론적으로 공교회에 편입이 되었다.

 

영지주의로의 발걸음 - 더 큰 요한의 무리는 분리주의자들의 신학을 수용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가현설 쪽으로 가버렸다. 예수께서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인 것처럼 보였다는 가현설과 예수가 선재할 때 자신들도 선재했다는 영지주의로 기울어졌고, 또한 몬타니즘(열광주의)으로 빠져서 성령을 받은 것을 넘어서 자신을 성령의 구현으로 이야기하는 부류가 생겨났다. 그들은 요한복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정경화 되는데 문제가 있었지만 결국 정경화 되었다.

 

8. 마가복음에 나타난 ‘제자직’(Discipleship)에 대해 서술하시오.

마가는 반복적으로 제자들의 실패를 강조한다. 사람 낚는 어부로 부름을 받은 제자들은 예수를 바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종종 예수의 뜻과 반대되는 행동을 보인다. 그들은 믿음이 없어 병자를 고칠 수 없었고, 제자들은 어린아이에 비교되기도 하였다. 그들은 예수의 임박한 수난 예고를 이해하지 못했고, 또한 받아들이지 못한다. 기도의 동산에서 예수께서는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도하였지만 열 두 제자 중에서 핵심인물인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은 잠을 청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십자가의 메시지를 알지 못한 사람들의 대표적 예로 거론된다. 위든은 마가는 세 단계로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묘사하였다고 제안하였다. 첫째, 인식하지 못함이다. 예수에 대한 무지를 보인다. 예수의 말을 알지도 깨닫지도 못한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둔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첫 번 단계보다 더 심각한 오해이다. 그들은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은 그들이 이 세상에서 성공을 성취하는 것, 그리고 큰 영광과 명예를 얻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셋째 단계는 거부이다. 그들은 마침내 예수를 버린다. 유대는 예수를 배반하였고, 마치 옷을 벗어버리고 도망한 청년처럼 모든 제자가 두려워서 도망하였다. 더욱이 가장 가까운 제자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였다. 

마가가 예수 전승에 대한 참 상속자로서 자신의 공동체를 형성하기 원했고, 또한 부적절한 것으로 사도들에 의하여 제시된 신앙의 이해를 폭로하였다는 것이다. 제자들의 이런 배반과 부인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결코 그의 선택을 후회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결코 그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실제로, 빈 무덤으로부터 울려 퍼진 메시지는 분명하게 예수는 자신을 버린 자들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독자들은 제자들처럼 그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그들이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자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것은 인식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여전히 예수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9. 요한 문서의 저자에 대한 전통적 견해를 수용하지 못할 근거에 대해 서술하시오. 

-교회의 전통은 요한복음을 포함하여 신약성서에 있는 다섯 권의 책이, 세배대의 아들 요한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전해주고 있다. 

(1)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소위 변화산 그리고 겟세마네에 대한 행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2) 세배대의 아들 요한의 기록이 요한복음 13장 이전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3) 그의 형제 야고보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4) 사랑하는 제자는 결코 마가복음 3장 17절에 있는 ‘우뢰의 아들’이란 성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5) 요한은 갈릴리 인이었다. 하지만 예수의 사역은 대부분 유대에서 이루어진다.

(6) 그는 십자가 밑에 있었다. 그러나 공관복음서에는 모든 제자들이 도망하였다. 

(7) 갈릴리 어부가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을 알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8) 요한의 형제는 사마리아인에 대한 적개심이 있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우호적이다.

(9) 요한복음의 기록 시기를 고려할 때, 사도 요한이 복음서를 작성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10. 누가복음에 나타난 ‘소외된 자’에 대한 관심에 대해 서술하시오. 

-복음서의 시작은 마구간에서 탄생한 예수에게 경배하는 목자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법정에서조차 증언이 허락되지 않았던 경시되고, 소외된 자들이 메시아 탄생의 증인이 되었다.(2:8-20). 마리아의 찬가는 낮고 가난한 자들을 찬양한다. 예수는 실제로 그의 사역을 “가난한 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온 것으로 묘사한다(4:18). 마찬가지로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은 종종 부자에 대한 적대감을 보여주는 많은 구절들에서 논증된다. 하나님은 배고픈 자에게 좋은 것을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부자들은 빈손으로 보낼 것이다.(1:53)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6:20-21) 그러나 부자는 망한다.(6:24-25) 예수는 부자가 어리석은 것으로 묘사되어진 비유들에서 이것을 모형적으로 예증하였다.(12:16-21) 누가만이 소개하고 있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16:19-31)는 누가가 처해 있던 공동체 내의 빈부 문제를 아주 잘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훌륭한 음식과 고급 의류 가운데서 사는 부자가 배고픈 자에게 가진 것을 전혀 나누어 주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돈 많은 의회원이 예수께 나아와 영생을 얻는 길에 대해 질문했을 때에도 예수는 그에게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라고 하신다. 부자가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길만이 영생을 얻는 길이요 그것이 바로 예수를 따르는 길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누가가 당시 자신의 공동체 안에서 심각해지고 있는 빈부 격차를 가능 한 줄여보고 빈부 간의 갈등을 해소시켜 보려는 의도에서 나왔을 것으로 보인다. 누가가 이렇게 소외된 자들에게 깊은 관심을 갖는 이유는 누가의 신앙 공동체가 주로 가난한 자들로 구성되어 있던 교회였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누가는 예수가 단순히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만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바로 가난한 자로 이 세상에 오신 분임을 말하고 있다. 이 점은 누가의 탄생설화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말구유”를 강조한 점을 보아서 말이다. 누가복음에서는 “달란트”가 아닌 다른 화폐 단위 곧 달란트보다 무려 60:1로 낮은 가치를 가진 “므나”가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누가는 예수의 같은 비유를 소개하면서도 화폐 단위만은 독자들의 생활 정도에 맞는 것을 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낮은 화폐 단위들을 사용한데도 누가의 공동체의 경제적 상황은 아주 어려웠던 것으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누가의 소외된 자에 대한 명백한 관심은 때때로 그로 하여금 부자에 대해 동정을 갖도록 하였다. 삭개오의 집에 구원을 가져온 것과, 세리에 대해 호의적인 예수님을 보면서 알 수 있다. 

 

* 여인에 대한 관심

- 다른 공관 복음서보다 누가복음은 여인의 위치를 높이 평가한다. 일반적으로 유대사회에서 여성의 위치는 추 20:17에서 추론해볼 수 있다. 시대에 따라 개선되기는 하였지만 1세기에도 여성들의 지위와 사회적 역할은 제한적이었는데, 누가는 보편적 인식과는 다른 새로운 여성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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