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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구약 성경

창세기 12장 주해

by 보통목사 2022.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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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세기 12 : 1 - 20 ∥

말씀 안에서의 <즉각>

말씀 밖에서의 <망각>

 

 

1. 본문 읽기

 
1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와요메르 예흐와 엘 아브람) 본문 서두는 하나님께서 이런 오랜 침묵을 깨고 아브람에게 말씀하신 것을 부각시킨다. 아브람에게서 새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구절은 창 11:27-32과 연결해서 읽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명령으로 출발한다. 본문이 ‘이르시되’(와요메르)로 시작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짐을 보여준다.
 
1절 너는... 가라(레크 레카) ‘레크’는 ‘걷다’란 뜻이 있는 ‘할라크’의 2인칭 명령형이다. 그리고 ‘레카’는 ‘너는’으로 번역된다. 2인칭 명령형 그 자체가 ‘너는 가라’란 의미가 있는 ‘레크’에 다시 ‘너는’이란 뜻이 있는 ‘레카’를 덧붙인 것은 만약 다른 사람이 불순종하여 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아브람 자신만은 흔들리지 말고 떠나 가야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1절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엘 하아레츠 아쉐르 아르에카) 본문에는 아브람이 가야 할 곳의 지명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는 것이 아니라 막연하게 하나님께서 지시하실 ‘그 땅(하이레츠)’으로만 표기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셨으나 실상 그가 가야 할 곳은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이 하나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말씀)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4절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와옐레크 아브람 카아쉐르 띱베르 엘라이우 예흐와) 본문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띱베르 엘라이우 예흐와)’ 앞에 전치사 ‘카’와 관계 대명사 ‘아쉐르’의 합성어를 넣어 아브람이 다른 기준은 전혀 없이 오직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만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음을 강조한다.
 
5절 떠나서 마침내... 들어갔더라(와예체우...와야보우) 유목 생활에서 ‘떠난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삶의 모습이었다. 본문은 지극히 간략하게 아브람이 하란을 떠나서 가나안에 도착한 사실만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실상 아브람 일행은 굉장히 먼거리를 떠돌아 가나안에 도착하였다. 이렇게 긴 경로는 사전에 치밀한 계획으로 이루진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약속된 말씀을 굳게 믿고 순종한 아브람의 반응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7절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와이벤 솸 미즈뻬아흐 라이흐와) 아브람이 단을 쌓은 행위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굳게 믿으며 또한 감사한다는 표현이다. 아브람은 하나님 말씀 그 자체만을 철저히 신뢰하고 먼저 단을 쌓았던 것이다. 또한 본문에 ‘여호와를 위하여’라는 표현을 쓰므로 여호와께 중심을 두는 아브람의 성숙한 신앙을 잘 보여 준다.
 
9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봐잇사 아브람 할로크 베나소아 한네게바) ‘남방’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게브’는 원래 ‘메마르다’란 뜻을 가진 ‘나가브’에서 유래하여 거친 땅을 말한다.
 
10절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봐에히 라아브 봐아레츠) 기근이 닥치면 극심한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다. 많은 가축을 이끌고 유목 생활을 하던 아브람에게 기근은 생존 그 자체를 위협받는 큰 위기였다. 그에 반해 애굽의 나일강은 많은 농작물 생산을 가능하게 했으므로 당시 훌륭한 피난처였다.
 
12절 나는 죽이고(웨하레구 오티) 본문을 직역하면 ‘그리고 그들이 나를 죽일 것’이다. 아브람은 자신이 죽임을 당할까 염려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아브람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한 것이다.
 
17절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와예낙가... 네가임 께돌림) 하나님의 개입은 이야기 전개의 전환점이다. 본문은 하나님의 강한 심판을 강조함으로써 바로가 사래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하신 것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20절 그들이... 보내었더라(와예솰레후)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는 아브람은 당시 절대 권력을 가졌던 애굽의 왕으로부터도 보호받을 수 있었다. 이는 택한 자 아브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며, 언약의 후손을 잉태하게 될 사래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얼마나 큰지도 보여준다.

 

2. 본문의 맥락

1) 원역사와 족장사를 잇는 다리에서

11장의 본문은 원역사 (창 1-11장)와 족장사 (창 12-50)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한다. 원역사의 출발은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사는 에덴의 아름다움이었으나, 원역사의 종착역은 아담의 아들인 인류가 여러 나라로, 여러 백성으로, 또 여러 지방으로 흩어지게 되는 것으로 마감한다. 바벨탑 사건(1-9절)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가는 과정의 종착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 다시 새롭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새 시대를 여는 여명기를 적어가고 있다. 아담의 10대손으로 노아가 나오듯이, 셈의 10대손으로 아브라함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이룰 족장사의 시작을 적어가는 것이다.

 

2) 데라의 족보에서 아브람으로

창세기에 실린 여러 계보 중에서 창세기 11장 27-32절의 족보는 “데라의 후예”만을 전하고 있다. 이 부분은 창세기 전체의 문맥에서 원역사의 말미이자, 족장사의 서두이다. 곧, 데라의 계보인 창세기 11:27-32은 원역사와 족장사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아담-노아-셈의 족보가 데라에게로 좁혀지고, 데라의 슬하에서 아브람의 탄생이 보도되는 이유는 데라의 족보가 아브람을 소개하는 다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데라의 족보, 그리고 데라의 이주 이야기를 통해 아브람으로 연결해 나아가는 것이다. 원역사의 말미에, 그리고 족장사의 들머리에 바로 이 데라와 아브람의 이야기가 자리하고 있다.

 

3) 아브라함의 삶과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본문의 범위는 창세기의 기본구조로 작용하고 있는 ‘계보’를 기준으로 설정되었다. 위의 본문의 내용(창 11:27-12:20)은 족장사가 원역사와 분리되어 있지 않고 원역사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보여준다. 데라의 계보 안에서 첫 번째 이야기로 나타나는 아브라함의 부르심은 또한 개인의 운명이나 생애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이스라엘의 운명과 사명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의 소명 이야기를 통해 이스라엘 역사가 어떻게 조망(眺望)되고 예시(豫示)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특별히 본문을 살펴볼 때, ‘아버지가 없는 조카 롯’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내 사래’를 데리고 길을 떠나는 아브람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라고 선언하시는 약속의 뜻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의 “역설”(irony)이다. 아브람의 현실과 너무나도 동떨어진 대조가 여기에 있다.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아브람이 자기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우김으로써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 자기 재산을 획득하게 된다는 데 있다. 아브람은 사래를 버리려고 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인이었기 때문에 버리려고 했던 것일까? 본문은 아브람이 버린 여인 사래를 하나님이 다시 아브람의 아내로 세우시는 것을 보여준다.

 

3. Unit 나누기

 

1) 본문은 9절에 기록되어 있는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를 기점으로 크게 둘로 나뉘어 구성될 수 있다. 여호와의 말씀 안에서 이루어지는 아브람의 즉각적인 모습을 설명하는 본문(1-8절)과 말씀 밖(애굽)에서 망각된 아브람이 겪는 수모를 전하는 본문(10-20절)이 그것이다.

 

Ⅰ. 말씀 안에서의 즉각 12:1-8

X.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12:9

Ⅱ. 말씀 밖에서의 망각 12:10-20

 

2) 본문에서 아브람의 소명은 1-3절에 진술되어 있으며, 4-8절은 그의 순종에 대해 말한다.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1절 ‘가라’에 대한 응답은 4절 “말씀을 따라갔고”에 나온다. A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렇다.

 

Ⅰ. 말씀 안에서의 즉각 (12:1-8)

A. 여호와의 말씀 1-3

B. 말씀에 따라감 4

C. 아브람의 행동 5-8

 

여호와의 언약의 말씀에 아브람은 그 말씀을 따라 즉각적으로 순종(반응)한다. 아브람의 가나안 땅 이주와 순례는 아브람의 믿음을 증언하는 구실을 한다. 아브람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다.

 

3) 사실 9절에 기록된 “점점 남방으로 내려갔다”는 본문의 이야기만으로는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본문은 돌연 아브람의 이주를 전한다. 아브람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땅을 떠나 남쪽, 네게브로 내려간 것이다. 분명한 것은 9절부터 이어지는 본문의 이야기(말씀 밖으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전의 모습과 다른 아브람을 보게 된다. 이어지는 본문은 단락은 아브람의 이주를 전하는 해설로 시작한다(10절). 이후 아브람의 행보는 이렇게 펼쳐지게 된다.

 

Ⅱ. 말씀 밖에서의 망각 12:10-20

A. 아브람의 잘못된 선택 10-17

1. 그 땅에 기근이 들어 애굽으로 내려감 10

2. 아브람의 상황 대처 11-13

3. 아브람의 상황 대처의 결과 14-17

a. 애굽의 환대 14-16

b. 하나님의 개입(재앙) 17

B. 아브람의 추방 18-20

1. 바로의 꾸짖음 18-19

2. 다시 애굽 밖으로 20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 밖으로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된다. 당시 많은 무리들을 이끌고 유목생활을 했던 아브람으로써는 최선(?!)의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브람은 오아시스와 같은 애굽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말씀 밖(애굽)에서의 생활은 만만치가 않았다. 애굽 땅에서 나그네살이를 하기 위한 아브람의 준비는 자신의 아내 사래를 버리는 궁리를 한 것이다. 아브람의 궁리는 성공한 듯 보였다. 바로에게 환대를 받게 된다. 그런데 아브람의 궁리를 하나님의 개입(재앙)으로 무산이 된다. 그로 인해 아브람은 바로에게 꾸짖음을 당하고 다시 애굽 밖으로 추방된다.

 

4. Composition

Ⅰ. 말씀 안에서의 즉각 12:1-8
  A. 여호와의 말씀(약속)
1. 너의 고향과... 떠나 내가 내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1
2.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너는 복이 될지라 2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3a
4.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3b
12:1-3
  B. 말씀을 (즉각적으로) 따라감
1. 롯도 그와 함께 감
2.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나이(75세)
12:4
  C. 아브람의 즉각적인 행동
1. 그의 아내 사래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5a
2. 가나안 땅을 가려고 떠나서 5b
3.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감 5c
4. 세겜 땅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함 6
5. 여호와께서 나타나 이르심 7
a.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7a
b.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나타나신 그곳에 제단을 쌓고 7b
6.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 8
12:5-8
  X.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Ⅱ. 말씀 밖에서의 망각 12:10-20
  A. 아브람의 잘못된 선택
1. 그 땅에 기근이 들어 애굽으로 내려감 10
2. 아브람의 상황대처 11-13
a.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음 11
b. 자신의 처지를 구체적으로 설득함 12-13
3. 아브람의 상황대처의 결과 14-17
a. 애굽의 환대 14-16
b. 하나님의 개입(재앙) 17
12:10-17
  B. 아브람의 추방 18-20
1. 바로의 꾸짖음 18-19
2. 다시 애굽 밖으로 20
12: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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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Performing

1) 본문의 시작(1절)은 아브람을 부르시는 여호와의 말씀과 함께 시작된다. 그 형식은 명령, 내용은 약속, 주제는 부르심이다. 아브람이 이전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제 여호와의 말씀(부르심)을 따라 사는 삶이 중요한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부르심)은 갑자기 왔다. “떠나...가라” 본문 읽기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이 표현은 스스로 가라라는 말씀(부르심)은 단순히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아브람의

 

 

책임성을 더불어 함께 명령하신 것이다. 이 명령은 약속과 함께 선포되었다. 그 말씀을 따라 아브람은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본문에 그 땅이 어떤 땅인지 나와있지 않은 것처럼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따라간 것이다. 아브람에 그 땅에 당도했을 때 여호와께서 다시 한번 나타나신다. 아브람은 그 자리에서 즉각적으로 제단을 쌓아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다. 장막을 옮겨 다른 곳에서도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2) 그렇게 신실했던 아브람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본문 읽기에서 기록된 것처럼 9절을 통해 아브람은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다. 이유를 불문하고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망각하고 자신에게 처해진 상황에 따라 이주했다는 것이다. 9절을 기점으로 앞서 기록된 본문(12:1-8)과는 대조가 되고 있다. 즉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아브람은 점점 말씀 밖으로 떠나게 된다. “그 땅에 기근이 심해서” 아브람은 애굽 행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애굽에서의 나그네살이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브람은 아내 사래의 미모 때문에 자기 생존이 위협받게 된 것을 두려워하고 염려한 것으로 보인다. 아브람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상황을 대처한다. 결과는 좋아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개입(12:17)으로 무산된다. 아브람은 망각한 것이다. 말씀을 떠나면서 그동안 보여주었던 즉각적인 순종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눈앞에 닥친 ‘살아남기’에 급급해하는 약해빠진 모습으로 전락된 것이다.

 

3) 본문의 대단원(12:18-20)은 바로의 꾸짖음으로 마치게 된다. 여호와께서 바로와 그 집안에 무서운 벌을 내리셨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여호와께서 바로에게만 재앙을 내리신 것이다. 아브람은 침묵하고 있다. 망각하고 있었던 여호와의 말씀을 기억하게 되었다. 신실하신 여호와께서는 바로를 통해 아브람을 꾸짖으신다. 아브람의 잘못된 선택은 재앙을 불러일으켰다. 아브람이 말씀 안에 있을 때는 그를 통해 축복이 흘러 나간다. 그러나 아브람이 말씀밖에 있을 때는 저주가 세상 속으로 퍼져 나간다. 약속에는 책임이 따른다. 여호와께서는 일방적인 약속을 하신 것이 아니다. 아브람과 함께 변함없는 약속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이자 의도인 것이다.

 

 

6. Message

아브람이 하나님과 대화를 시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먼저 말씀하셨다. 아브람은 죄인이었지만 순전히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하나님과의 교제를 시작했다. 구원의 하나님의 은혜와 그분의 선택으로 시작된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이루느냐가 아니고 누구를 만나느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람에게 있어서 인생 최고의 날은 하나님이 찾아오신 그 날인 것이다. 하나님이 찾아오신 순간 아브람의 인생은 절망(11:27-32)에서 소망(12:1-3)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그 말씀과 함께 아브람의 믿음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아브람을 불러내신 것이다. 그리고 말씀을 통하여 아브람의 인생에 목적과 사명과 능력을 더불어 주신 것이다. 새로운 약속의 땅으로 가려면 반드시 죄악 된 옛 보금자리를 떠나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해 “너희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하신다. 보여준 땅도 아니고,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야말로 아브람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던 것”(히 11:8)이다. 그럼에도 아브람은 말씀을 따라 즉각적으로 순종(12:4)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의 지평을 열어갈 아브람에게 사명과 함께 축복을 약속하신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을 창대하게 하고”,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고”,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정말 엄청난 축복이 아닌가? 아브람의 축복은 아브람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아브람을 비롯해 모든 사람을 위한 축복이었다. 아브람이 그 축복의 통로가 된 것이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즉각적으로 길을 떠났다. 믿음은 말씀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아브람의 위대성은 즉각적인 순종이다. 당시 아브람의 나이는 75세로 중년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의 하프타임에서 그는 거룩한 모험을 시도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는 힘이 솟았다. 약속한 땅에 도착한 아브람은 장막을 치고, 제단을 쌓았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아브람은 가나안이라는 이방 땅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예배했던 것이다. 그랬던 그가 본문 9절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점점 남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점점 옮겨갔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가나안 지역이 하나님으로부터 받기로 약속된 땅임에도 불구하고 아브람 일행이 계속 이동하는 고달픈 유랑 생활을 하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브람이 거친 남방 땅으로 이동한 이유는 가나안 지역에 이미 정착한 원주민들의 경계심 때문이었던 것으로도 추측된다(창 12:6). 9절을 기점으로 말씀 밖으로 떠나게 됨을 볼 수 있다. 말씀을, 하나님의 약속을 망각한 것이다. 상황에 따라 아브람은 자신의 생각대로 이동한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근이 왔다. 최악의 불경기가 아브람에게 찾아온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만 믿고 수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약속의 땅이라고 해서 먼 거리를 왔는데, 기본적으로 먹을 것 하나 없이 굶어 죽게 생겼으니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겠는가?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움직인 아브람이라면, 그 자리를 떠날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떠남이 마땅한데 그렇지 않았다. 아브람은 당시 풍요로움의 상징이었던 애굽까지 내려갔다.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이전과는 전혀 다른 문제에 봉착했다. 자신이 죽임 당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자신의 아내 사래를 설득하여 바로에게 넘기게 된다. 아브람은 말씀을 따라 행동하지 않고, 상황을 따라, 자신의 생각을 의지한 채 문제를 대처했다. 그것은 하나님을 충분히 망각하고도 남은 행동이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오늘 본문을 통해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아브람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시야에서 몽땅 벗어 버렸다!” 아브람이 그동안 보여주었던 말씀에 따른 즉각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망각만이 남은 건인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내팽개쳐버리고 눈앞에 닥친 “살아남기”에 급급한 하나님 없는 자로 전락되고 만 것이다. 믿음의 시련이 올 때 우리의 반응은 ‘당장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 상황을 통해서 내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계신가?’를 묻고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 아브람의 잘못된 선택, 실수로 인해 믿음의 조상이 될 사래가 이방인인 바로의 후궁이 될 위기에 처했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인간의 실수로 인해 붕괴될 위험에 부딪친 것이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은 지체 없이 이 상황에 개입하셔서 바로잡으신다. 무서운 재앙이 바로와 그 집을 덮치게 된다. 바로는 재앙이 아브람 때문임을 밝히면서 아브람을 책망한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사실은 죽임을 당해도 무방한 아브람을 선처해서 사래를 돌려주고, 많은 재물까지 주어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바로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하나님은 바로에게 개입하셔서 아브람을 꾸짖으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람의 실수를 뜻하지 않은 은혜로 갚아주신 것이다. 이것이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인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기에 있다. 아브람은 말씀 밖으로 망각된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번 말씀을 따라 즉각적인 자신의 모습으로 애굽을 떠나 여정 길에 오르게 된다.

 

  

<아브람과 사래 그리고 롯의 관계 l 전통적 해석>

 

아브람의 <실수>

여호와의 <신실>

창 12:10-20 중심으로

(전통적 해석에 의거하여)

 

 

Ⅰ.12:10-16 아브람의 실수

A.12:10-13 애굽으로 향함 (아브람의 두려움)

B.12:14-16 애굽에서의 일

Ⅱ.12:17-20 여호와의 신실

A.12:17 여호와의 재앙

B.12:18-20 사건의 해소

 

본문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복과 약속을 받은 이야기 바로 다음에 나온다. 그러나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아브람의 모습은 기근으로 인하여 약속의 땅에서 나가야 하고, 바로에게 아내를 빼앗겨 후손을 이어갈 수 없는 위기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하나님의 약속의 주요 내용인 땅과 후손에 대한 복이 자연현상과 인간의 개입으로 인하여 실현 불가능하게 될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때 아브람은 자신의 힘으로 이 위기를 극복하려고 한다. 그러나 본문은 이러한 위기는 이간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해결됨을 전해주고 있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실수>를 범했다. 그 결과는 애굽에 재앙이 내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이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직접 개입하신다.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던 언약을 이루기 위해 <신실>하신 모습을 보이시는 것이다.

 

놓칠수 없는 아들!

놓쳐도 되는 부인?

 

1. 조카 롯과 함께 떠나는 아브람 창12: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명령하셨을 때 아브람은 아버지를 일찍 잃은 롯을 함께 데리고 떠난다. 롯은 아브람의 조카임에 분명하지만 아들 없는 아브람에게 롯은 아들이었고, 아버지 없는 롯에게 아브람은 아버지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2. 위기에 처한 사래를 누이로 포기 창 12:10-20

땅에 기근이 들어 애굽으로 내려갈 일이 생겼을 때에 아브람은 부인 사래를 누이로 포기하고 만다. 그는 자신과 그의 재산을 지킬 생각은 하지만 부인 사래를 지킬 생각은 하고 있지 않다.

 

 

3. 위기에 처한 롯을 구하는 아브람 14:1-24

아브람은 롯이 위기에 처하자 그 롯을 구하기 위해 모험을 시도한다. 위기에 처한 부인 사래를 누이로 쉽게 포기하는 창 12:10-20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당시의 제왕들의 전쟁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아브람은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롯을 구해온다. 그리고 롯을 구하고 돌아오는 길에 살렘왕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하는 모습이 나온다.

 

4. 롯이 있는 소돔을 위해 중보 하는 아브라함 창 18:16-33

하나님이 소돔을 심판하신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롯이 있는 소돔을 위해 간절히 중보기도를 한다. 그만큼 아브라함은 롯을 아들과 같이 사랑했다. 역시 아들과 같은 롯을 다시 한번 구하는 장면이다.

 

5. 위기의 순간에 사라를 누이로 포기하는 아브라함 창 20:1-18

창 12장과 동일한 패턴과 내용의 이야기이다. 이는 바로 앞부분 롯이 있는 소돔을 위해 간절히 중보 하는 아브라함의 모습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계속해서 아들과 같은 롯은 살리려고 애를 쓰고, 부인은 그에 비해 소홀하게 대함을 보여주고 있다.

 

6. 그밖에 아들에 집착하는 아브람의 모습

 

1) 엘리에셀 창 15:2-3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혈육으로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에 아브람은 몸종 엘리에셀을 아들로, 상속자임을 드러낸다.

2) 이스마엘로 만족하는 아브람 창 16:16-17:1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아브람은 하나님이 사래를 통해 대를 이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도, 기다리지 못하고 몸종 하갈을 통해 아들 이스마엘을 낳는다. 본문은 팔십육 세에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낳은 이후에 구십구 세까지 아무 일도 전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구십구 세가 되어서야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완전히 행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아 그동안 아브람은 이스마엘을 아들로 만족하며 언약과 관계없이 살았음을 암시적으로 알 수 있다.

 

7. 아브라함을 <아들>로 시험하시는 하나님 창 22

결국 아들에 집착하고, 아들을 우상화하는 아브라함을 향해 하나님은 백세에 주신 이삭을 바치라는 믿음의 시험을 하시게 된다. 이는 앞에서 보여준 아브라함이 아들에 집착하고 있는 복선들을 통해 하나님의 갑작스럽고 억지스러운 요구와 시험이 아님을 알게 해 준다. 아브라함은 22장에 와서야 아들보다 하나님을 중히 여기는 믿음을 보여주게 된다.

 

<아브람과 롯, 사래의 관계를 통해 본>

말씀 안에서의 <살림>, 말씀 밖에서의 <버림>

 

창세기 12장부터 25장 까지는 아브람의 삶과 죽음의 이야기이다. 그중 특별히 12장에서부터 21장에서의 아브람과 롯 그리고 사래의 관계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겠다.

 

사래 _ 매정한 아브람

아브람과 사래와의 관계를 크게 2가지의 사건을 통해 살펴보겠다.

 

1. 12장의 이야기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 애굽 땅에 거류하려고 내려간다. 그곳에서 아브람은 사래에게 당신을 자신의 누이라고 하라고 말한다. 사래가 보기에 아리따웠기 때문에 자신의 아내라고 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12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13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애굽에 이르렀을 때, 생각했던 것과 같이 많은 애굽 사람들이 사라의 아리따움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애굽의 왕 바로의 궁에까지 들어가게 된다. 아브람은 자신의 아내가 바로의 궁에까지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화를 내기는커녕 바로가 주는 재물에 만족하는 듯하다.

16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낙타를 얻었더라

우리가 아는 믿음의 조상 아브람과는 거리가 먼 듯 보인다.

 

2. 20장의 이야기

창세기 20장은 어떤 설명도 없이 그냥 자신의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말한다.

1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 2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 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12장의 사건과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건 역시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람이 저지른 일이라고 보기에 어렵다. 앞의 사건과 동일하게 아브람은 자신의 생명을 위해 아내를 누이로 만들어 버렸다.

11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지금까지 12장과 20장에 나와 있는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아브람과 사래의 이야기를 살펴보았다. 다음으로는 이와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아브람과 롯의 이야기를 보겠다.

 

롯 _ 의리파 아브라함

 

1. 14장의 이야기

14장에는 그의 조카 롯을 구하는 멋진 아브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요단 지역을 선택하고 동쪽으로 옮기던 롯은 그 땅에 있던 네 왕들에게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기게 된다. 또한 롯 자신도 사로잡히게 되는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람은 용감하게 삼백 십팔 명의 훈련된 사람들을 거느리고 롯을 구한다.

14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15 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16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

13장의 벌벌 떤던 아브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용감한 아브람의 모습이 나온다. 자신이 죽을까 봐 아내 사래를 누이로 만든 아브람의 모습이 죽음을 무릅쓰고 롯을 구하는 용감한 모습으로 바뀐 것이다.

 

2. 18장의 이야기

이런 아브람의 의리 있는 모습은 18장에서도 동일하게 찾아볼 수 있다. 아브람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여호와의 계획을 듣게 된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한다는 소식이었다. 이 말을 들은 아브람은 적극적인 자세로 롯과 그의 자녀들 그리고 그 땅의 사람들을 구하려고 한다.

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23 아브라함이 가 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50명의 의인으로 시작했던 그의 간구는 열 명의 의인으로 마친다. 이 대목에서도 의리파 아브람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너무도 다른 아브람

이상으로 사래와 롯을 대하는 아브람의 서로 다른 태도에 대해 살펴보았다. 자신의 생명을 위해서 아내를 누이로 만들어 버리는 아브람의 모습과 자신의 생명보다는 롯을 위해 싸우고, 간청하는 아브람의 태도가 재미있기까지 하다. 혹자는 사래가 아직 아들을 낳지 않았기 때문에 천대하고, 롯은 아들같이 대하기 때문에 선대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힘이 없는 이유가 사래를 누이라고 부르는 행동이 18장의 아들 이삭을 약속받은 다음에도 동일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말씀 안에서의 살림, 말씀 밖에서의 버림

우리는 이 살림과 버림의 이유를 “땅”으로 보았다. 사래를 버리는 사건은 언제나 약속의 땅 가나안을 벗어날 때였음을 발견할 수 있다.

창세기 12장 10절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허였음이라

창세기 20장 1절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

하나님이 말씀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을 벗어났을 때는 여지없이 사래를 자신의 누이로 속이고 버린 것이다. 바로 하나님보다 이방민족이 더 커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롯을 살리는 아브람의 이야기의 배경은 모두 가나안 땅이었다.

창세기 13장 18절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 단을 쌓았더라

창세기 18장 1절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 에 낮아 있다가

가나안 땅, 즉 말씀 안에 거할 때 아브람은 주저하지 않고 롯을 살리려고 힘썼다. 이방민족보다 하나님이 더 커보였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래와 롯의 관계는 여자와 남자, 혹은 자식이 있고 없고의 문제를 떠나서 바로 말씀의 <땅>에 있느냐의 문제로 볼 수 있다. 말씀의 땅 가나안에 있을 때에는 롯을 살리는 아브람, 말씀의 땅 밖에서는 사래를 버리는 아브람의 극명한 대조를 통해 우리는 아브람의 위대함보다는 하나님의 위대함에 집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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