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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신약 성경

기도에 대한 세 가지 오해

by 보통목사 2022.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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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하는데요. 

아마 대부분의 분들은 “아~또 기도하라는 거구나” “믿고 기도하면 된다고?” 맨날 들었던 말이겠지라고 생각하셨다면, 글을 끝까지 읽어보세요.

모태신앙이라면 특히, 기도에 관한 말씀을 어린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을 겁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기도에 대한 이미지는 대개 세 가지 정도의 이미지입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드리는 믿음의 기도, 주실 때까지 부르짖어 간청하는 간절한 기도, 불평이나 탄식은 조금도 허용되지 않는 감사와 찬송의 기도! 누군가 제게 위의 세 가지 모습의 기도를 얼마나 하냐고 물어보시면, 목회자인 저도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사실 저도 꽤 오랜 시간 동안 기도는 의심 없이, 간절하기, 감사와 찬송으로만 드리는 것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기도에 도전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제가 하는 기도는 진짜 기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나 늘 기도가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이중에 저와 같은 분들이 많이 계실 겁니다. 

“목사님, 기도하는데 자꾸 의심이 생겨요. 부르짖고 싶은데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눈물도 나오지 않아요.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들고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도 해요. 저는 언제쯤 진짜 기도를 할 수 있을까요?” 

 

만약 이런 고민을 갖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자유함을 누리게 되시길 바랍니다.  제가 오늘 나누려고 하는 이야기는, 기도에 관한 잘못된 오해들입니다. 이런 오해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늘 기도가 생활이 되지 못하고, 기도에 도전하지 못합니다. 오늘 영상을 통해 우리가 갖고 있는 기도에 대한 세 가지 오해를 살펴보고, 기도에 다시 도전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기도에 대한 첫 번째 오해 “기도할 땐 절대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기도할 때는 절대로 절대로 의심하지 말라는 겁니다. 의심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것이죠. 

 

어떤 한 청년이 결혼을 위해 기도를 합니다. 평소에 좋아하던 자매를 생각하며 믿음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이 자매를 제 아내로 허락해 주시옵소서.” 1단계의 기도입니다. 기도의 단계가 올라가면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이 자매를 제 아내로 허락해 주실 줄 믿습니다!” 마지막 최종 단계가 되면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이 자매를 이미 제 아내로 주신 줄로 믿고, 감사드립니다! 할렐루야!” 

 

어떠세요? 올바른 기도로 보이시나요? 교회에 있으니 용납이 되지, 사회에 나가면 스토킹으로 잡혀갑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시험공부를 하나도 안 했습니다. 시험 전날 경건하게 목욕재계를 하고, 내일 시험 볼 과목의 교재를 펼쳐 놓고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정말 한치의 의심 없이 하나님께서 내일 시험에서 백점 맞게 해 주실 줄로 믿고 기도를 합니다. 그렇게 철야 기도를 합니다. “내일 시험지를 받았을 때 답이 보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답이 보이게 하신 줄로 믿고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밤이 새도록 의심 없이 기도한다고, 그게 진짜 기도가 될 수 있을까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드리냐 하면, 의심이 없어야만 바른 기도라는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서입니다. 기도할 때 의심이 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게 맞는 건가?’ ‘정말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들어주실까?’ 왜 의심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분들이 제시하는 성경 말씀이 야고보서 1장 6절과 7절 말씀입니다. 

 

6.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 1:6-7)

 

이 말씀은 자신이 생각하는 기도제목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위의 말씀들을 읽어 보면, 시험과 환란 중에도 이 모든 것을 능히 이기게 하시고 선하게 인도하실 선하신 하나님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혹시 의심이 들어서 기도를 멈춘 분이 있으시다면, 다시 기도를 시작해보세요. 의심이 생기면, 솔직하게 하나님께 그 의심까지도 기도제목으로 드리시기 바랍니다. 대신, 한 가지만 의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인자하심, 그리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그 믿음으로 기도한다면, 비록 백 프로의 믿음이 아닐지라도, 여전히 내 마음에 미래에 대한 의심과 불안의 마음이 있을지라도, 주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줄로 믿습니다. 

 

기도에 대한 두 번째 오해 “죽기 살기로 매달리는 간절함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물론, 기도 할 때 이런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간절함이 없으면 진짜 기도가 아니라는 말은 잘못된 말입니다.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는 분들이 제시하는 대표적인 성경말씀은 누가복음 18장에 있는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의 이야기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느 한 도시에 아주 못된 재판장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과부가 자신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재판장에게 요청합니다. 그러나 불의한 재판장은 연약한 과부의 말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이 과부가 보통이 아니어서, 날마다 자신을 찾아와 괴롭힐 것 같았습니다. 더 이상 귀찮기 하기 전에 과부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7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 18:7)

 

이 말씀은 언뜻 보면 불의한 재판장도 귀찮게 하면 들어주는데, 하나님께도 마찬가지고 계속해서 간청하고 죽기 살기로 매달리며 귀찮게 해 드리면 응답해 주신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고, 더 간절해야 한다고, 더 울어야 한다고, 지금 그게 간절한 사람의 목소리냐고 더 부르짖으라고 더 울라고! 여러분, 어떻게 사람이 날마다 그렇게 간절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열흘만 기도했다가는 탈진합니다. 

 

이 말씀은 불의한 재판장과 하나님을 비교한 것이 아니라, 대조한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불의한 재판장은 과부의 간절함에 어쩔 수 없이 청을 들어주었다. 그러니 하나님께도 그렇게 기도하라! 가 아니라 

불의한 재판장은 과부의 간절함에 어쩔 수 없이 청을 들어주었다. (이제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음소리에도 응답하시는 선하신 재판장이시다는 의미입니다. 이해가 되시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한지 수치를 재고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주머니 속에 사탕이 있지만, 손자들이 떼를 쓰고 졸라대지 않으면 사탕을 꺼내지 않는 인색한 할아버지가 아니시라는 겁니다. 

 

더 이상 부르짖을 힘도, 매달릴 힘도 없이 주저앉아 있을 때, 새어 나오는 신음소리에도 응답하시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는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여러분들이 학교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어려움과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는 것. 하나님은 그것도 기도로 여기시고 들어주시고 응답하십니다. 우리의 기도가 반드시 간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 모든 순간순간마다 작은 소리도 좋고, 생각과 마음으로라도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기도에 도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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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세 번째 오해입니다. "감사와 찬송만 드려야 한다" 

우리의 머릿속에는 왠지 하나님께는 불평과 원망도 해서는 안 될 것 같고, 다른 사람 욕을 하면 안 될 것 같은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그래서 불평과 짜증이 올라올 때는, 그냥 짜증을 내지 그 순간 기도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언제 합니까? 그렇게 짜증과 불만의 마음이 어느 정도 가시면, 그때부터 고상한 기도를 시작하죠. 방금 전까지 친구와 싸워서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라와도, 기도할 때는 “사랑의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그 친구를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마치면, 다시 친구랑 싸우죠. 

 

이런 일을 반복하다 보면, 이중적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그때부터는 원망과 짜증이 생길 때는 아예 기도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은 정말 감사와 찬송으로만 드리는 기도는 받으시고, 원망과 불평의 기도는 받지 않으실까요? 

 

하나님을 향한 기도문으로 가득 차 있는 시편을 보면, 우리 생각에는 감사와 찬송의 말로 가득 차 있을 것 같은데, 정 반대입니다. 무려 절반이 불평과 불만과 원망의 말로 가득 차 있습니다. 몇 군데만 살펴보겠습니다.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더 이상 찾아낼 수 없을 때까지 찾으소서(시편 10:15)
의인이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의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시편 58:10)
연기가 불려 가듯이 그들을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시편 68:2) 

무섭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기도이지만 분노와 한탄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또 악인을 향한 원망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는 기도도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크게 외치신 말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시편 22편에 나와 있는 기도인데요.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탄식의 기도입니다. 

 

기도를 할 때, 꼭 감사와 찬송만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 마음과 속은 전혀 감사하지 않은데, 억지로 감사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런 생각이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짜증이 날 때는 짜증을 내고, 원망의 마음이 들 때는 원망을 하십시오. 미워하는 마음이 들 때는 솔직하게 밉다고 말씀하십시오. 누구에게?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정말 자녀 된 특권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직장상사처럼, 교수님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불완전한 감정도, 짜증 나는 마음도 다 드릴 줄 아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기도에 대한 오해들을 함께 살펴봤는데요. 어떠셨나요?

“나는 이게 기도가 아닌 줄 알았는데 그래도 내가 기도를 하고 있었구나” “나도 기도를 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혹시 들지 않으셨나요?  

 

하나님을 교수님이나 회장님 정도로 생각하면, 기도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치, 학점을 고쳐달라는 부탁을 드리기 위해 교수님을 찾아가듯, 옷차림부터 말투 표정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고민하고 고려해서 어렵게 문을 두드리는 것! 이건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내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누리는 것! 그게 바로 기도입니다. 여러분, 부모님 만나러 가는데 엘리베이터 앞에서 옷매무새를 다듬고, 머리도 다시 빗고, 목소리도 가다듬고, 드링크제 하나 들고, 어렵게 어렵게 노크하며 들어가세요? 아니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문 열고 들어가시잖아요. 들어가면 아무렇지도 않게 “엄마 밥 줘~” “아 걔 엄청 짜증 나!”라고 말하시잖아요? 혹시, “어머니, 제가 가진 게 5천 원뿐이 없는데, 5천 원어치 밥을 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라고 하세요? 

 

그런데 왜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하나님과는 그렇게 거리를 두고, 어려워하시나요? 짜증 나면 짜증 난다. 어려우면 어렵다. 힘들면 힘들다. 내 힘으론 어려우니 도와 달라. 여러분, 이렇게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세요. 말로만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시다고 하지 마시고, 친밀한 기도를 통해 그 자녀 됨을 날마다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감동적인 이야기 하나를 들려드리고 오늘의 글을 마치겠습니다. 

그린웨이라는 목사님이 멕시코 선교 중에 겪은 이야기인데요. 어느 늦은 밤에 누군가가 문을 세차게 두드렸습니다. 누군가 하고 나가봤더니 10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가 겁에 질린 얼굴로 서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자신의 엄마는 네 살 때 죽었고,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는데, 3개월 전쯤 술에 취한 아버지가 자기를 총으로 쏘려고 해서 도망 나왔다는 겁니다. 그렇게 3개월 동안 거지처럼 살아온 이 소녀는 목사님 댁이라는 소문을 듣고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찾아왔습니다. 목사님은 일단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고 며칠 동안 집에서 머물게 했습니다. 그리고 가족회의가 열렸습니다. 집도 가족도 없는 이 소녀를 그냥 보낼 수 없다는 의견이 모아졌고, 입양을 결심하게 됩니다. 내가 널 내 딸로 입양해도 될지, 소녀에게 물어봤고, 소녀는 기뻐했습니다. 그렇게 입양이 결정되는 날 그린웨이 목사님은 그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너는 내 딸이다. 이 집에 있는 건 뭐든지 다 먹도 되고,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말해라. 내가 다 줄 테니!” 그런데 아이는 한 번도 그린웨이 목사님에게 자기가 필요한 것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집에 있는 음식들도 누가 주기 전까지는 먹지 않았습니다. 갖고 있던 장난감을 목사님의 자식이 뺏어가도 울거나 짜증 내지 않고, 조용히 자기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소녀의 마음이 느껴지시나요? 다시 버림받고 싶지 않은 마음입니다. 내가 뭔가를 요청하고 소란을 피우면 또다시 버림받지는 않을까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이죠. 하루는 목사님이 서재에 있을 때, 소녀가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답니다. 소녀가 목사님을 찾아온 건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니, 소녀는 말했습니다. “아빠, 신발 끈이 필요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린웨이 목사님은 돌아서서 한참을 울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이, 드디어 소녀가 목사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인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모습이 혹시 이 소녀의 모습과 같지는 않나요? 주님은 나를 자녀라고 불러주시고,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말씀하지만, 여전히 눈치 보고 쭈뼛거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렇게 기도해도 될까?” “혹시 하나님이 싫어하시면 어쩌지?” “내가 뭘 해야 하나님이 마음에 들어 하실까?” 

그렇게 하는 기도는, 아버지께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저, 높은 사람에게 하는 청탁입니다. 

진짜 기도는 뭘까요? 아프면 아픈 대로, 짜증 나면 짜증 나는 대로, 괴로우면 괴로운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그렇게 꾸밈없이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그것이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자녀 된 우리가 드리는 기도입니다. 

 

마지막으로 누가복음 11장 9절의 말씀을 이렇게 바꿔 보았습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의심이 있어도 구하라

작은 신음으로도 찾으라 

탄식과 원망으로도 두드리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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