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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신학 과제

구약주석 새로 보기, 독창의 소리 합창의 울림

by 보통목사 2022.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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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창의 <소리>, 합창의 <울림>

 

 

머리말 

   평소에 TV를 잘 보지 않던 내가 최근 아주 재미있게 본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남자의 자격이라는 프로그램이다. 남자의 자격은 남자가 죽기 전에 해야 할 101가지라는 타이틀로, 이경규 씨를 비롯한 구성원들이 한 가지씩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중 오늘 말하려고 하는 것은 <합창 대회> 편이다. 이들의 미션은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여 2달간의 연습을 통해 합창 대회에 나가는 것이다. 오디션을 통해 정말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뽑는다. 트로트 가수, 개그우먼, 아나운서, KBS 행정직부터 이종 격투기 선수까지 정말 다른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이들은 너무 다른 사람이었지만 한 곡을 위해 목소리를 맞추어 갔고, 합창 대회를 미션을 훌륭하게 완수하게 된다. 이 합창 대회 편은 남자의 자격 프로그램 역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게 되고, 연일 매스컴에서는 합창단의 이모저모에 대해서 보도하기 시작했다. 함창단이 불렀던 <Nella Fantasia>는 어린아이들도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로 대중화가 되었다.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 프로그램에 열광할까? 합창단원 중에는 요즘 뜬다는 아이돌 가수들이 있던 것도 아니고, 매일매일 재밌는 소재가 나온 것도 아니었다. 도리어 그 프로그램은 다른 프로그램보다 자극적이지도, 재밌지도, 흥미를 끌만한 소재를 내세우지 않았다. 오직 그들이 모여서 연습하는 것밖에 보여준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을까? 나는 이것이 합창이 주는 감동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개성이 최고라고 말하는 이 시대 가운데 합창이 주는 울림이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 것이다. 나는 독창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배다해라는 인물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배다해는 <Nella Fantasia>라는 곡에서 독창을 맡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합창을 더 좋아한다. 각기 다른 소리들이 모여 하나의 울림을 만들 때 느껴지는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 합창의 울림이 성서의 울림과 같다고 생각한다. 많은 여러 소리들이 있지만 하나의 울림을 만들어내는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독창의 소리에만 집중했다면 오늘은 합창의 울림에 귀 기울이기 바란다. 배다해 한 사람의 소리에 열광하기보다는 34명의 합창단의 울림에 집중하길 바란다. 성서의 울림을 함께 느껴보자! 

 

 

몸 말 

 1. 독창의 소리 _ 양식비평 중심의 통시적 해석

    양식비평은 궁켈과 함께 시작되었다. 성서 해석에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 본문의 장르를 깨닫는 일이었다. 이제까지 저자의 의도에 초점이 맞추어졌던 관점에서 눈을 돌려 저자가 아닌 양식을 중요하게 취급하게 된 것이다. 특히 그는 “삶의 자리”라는 말을 만들었는데, 삶의 자리를 통해서 어떤 양식의 글이 어떤 제도 속에서, 어떤 환경의 영향을 받아 전승되게 되었는지 살펴보게 된다. 이러한 관심은 점점 텍스트가 형성되기 이전 단계에 집중하게 된다. 현재 지금의 양식이 되기까지 그 이전의 과정과 단계가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본문의 의미를 명확하게 해주기보다는  여러 가지 잡음이 많이 나게 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이는 마치 독창의 소리와 같다고 할 수 있겠다. 독창은 말 그대로 혼자 부르는 노래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만의 색깔이 강하고, 개인의 특색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때문에 다른 사람과 맞출 필요도 없고, 오직 자신의 목

 

소리만 드러나도록 부르면 그만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독창을 좋아한다. 특히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솔리스트의 노래를 들을 때면 눈과 귀의 즐거움이 더하다. 여럿이 부르는 중에 한 사람이 나와 독창을 할 때면 모든 시선과 관심이 그 사람에게 집중된다. 나는 독창의 단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독창은 노래 자체보다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에 더 집중하게 만든다. <어떤> 노래를 부르느냐 보다 <누가> 노래를 부르냐가 더 중요한 것이 독창이다. 난 이러한 일이 성서 해석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까지의 성서 해석은 본문 자체보다는 그 본문을 누가 썼는지, 그 사람이 의도한 바는 무엇인지, 최초의 형태가 어떠했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많은 성서 학자들이 놓치는 것이 있었는데, 본문이 어떤 말을 하느냐이다. 그들의 관심은 솔리스트에게만 있었지 정작 그 노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독창이 주는 기쁨이 있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통시적 해석이 주는 기쁨이 있다. 하지만 이 기쁨에 머물러서는 합창의 감동을 알지 못한다. 독창에만 머물러 있다면 소리가 모여 만드는 울림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통시적 해석이 독창이라고 하면 공시적 해석은 합창이라 할 수 있다. 이제부터 합창의 울림을 들어보자. 

 

2. 합창의 울림 _ 구조주의 Composition!

   우리가 집중해서 볼 것은 크니림의 구조 분석이다. 이제까지 양식 비평이 현재의 양식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단계에 관심을 가졌다면 크니림은 최종 형태의 본문을 해석 대상으로 삼는다. 그는 텍스트의 소단위문학 단위를 찾는 것은 해석의 과제로 여기지 않는다. 삶의 자리의 역사적 흐름을 추적하던 노력에서 최종형태의 본문을 생성시킨 문화적, 사회학적 정황을 묻는 노력으로 탈바꿈하였다. 현재 주어진 본문의 구조를 통해 의미를 파악하려고 한 것이다. 구조라는 단어는 모여서 전체를 이루게 되는 부분들이 서로 짜여 있는 관계나 배열되어 있는 체계를 말한다. 구조주의자들은 “글자와 글자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살핀다. 구조주의는 성서의 역사비평적 해석을 거부한다. 성서본문을 하나의 직물로 여기고, 최종 형태의 본문을 해석의 텍스트로 여긴다는 점에서 20세기 후반에 대두된 공시적 성서 해석과 그 궤를 같이 한다. 이 구조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구조란 발견되는 것이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본문을 읽는 것이 아니라 본문이 나를 읽게 할 때 올바른 성서 해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합창이 주는 감동이 여기에 있다. 합창은 각기 다른 사람들이 한 울림을 내어 하나의 곡을 부르는 것이다. 서두에 언급한 남자의 자격을 기억하는가? 참여한 사람들의 직업은 천차만별이었다. 나이는 어떤가? 성별은 어떤가? 모두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한 울림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합창은 어느 한 사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모두가 함께 만들어 가는 하나의 울림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이 자신의 목소리를 더 내려고 했다가는 지휘자에게 여지없이 야단을 맞게 된다. 아니면 어느 한 사람이 조금 힘들다고 자신의 소리를 내지 않으면 그 합창은 순식간에 무너지게 된다. 바로 이것이 합창이 주는 묘미가 아닌가 생각한다. 성서의 해석도 이와 같다. 중요한 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최종 형태의 본문이다. 이전까지의 연습 과정이 어떠했건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느 사람이 얼마나 더 잘나고 멋진 목소리를 가졌는지는 큰 관심거리가 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본문이고, 우리 앞에 있는 합창의 울림인 것이다. 한 사람의 소리에 집중하면 합창이 주는 울림을 느낄 수 없듯이, 저자의 소리와 역사적인 소리에만 집중한다면 본문이 주는 울림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본문 자체의 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여 보자! 합창이 주는 감동과는 비교도 안 되는 더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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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합창의 울림 _ 문예적 형식

   이야기의 문예적 형식을 통해서도 합창이 주는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이 형식의 기본 근거는 구조주의와 같이 현재 우리에게 있는 최종 형태의 본문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성서의 시작 자체가 읽으라고 있는 것이지 연구하라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성서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은 누구나 단어, 행동, 대화, 해설을 통해서 성서이야

 

기가 무엇을 전달하고 있는지를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서의 메시지는 문학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전달되고 있다. 성서의 문예적 해석이란 성서 안에 나타난 문예적 기법들과 문학적 관례들을 우리들이 알아챌 수 있는 언어로 재구성하고 재발견하는 작업이다. 성서의 문예적 해석은 결코 기존 문학이론이나 문학적 방법론을 가지고 성서이야기를 들여다보는 작업이 아니다. 본문 안에서 울려 나오는 의미를 강조한다. 

   독창은 부르는 사람에 집중하게 되고 합창은 부르는 노래에 집중하게 된다고 서두에 언급한 바가 있다. 알터가 말한 문예적 형식은 기존의 문학적 방법으로 해석한 방법과는 다르다. 본문을 분석하고 해체하는 것이 이 전까지의 방법이었다면 본문 자체의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것이 문예 주의라는 것이다. 합창도 마찬가지로 한 소리 한 소리를 신경 쓰다 보면 소리가 모여 울림이 되어 만드는 화음을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알토의 소리만 집중해서 듣는 것도 아니고, 소프라노의 소리에 집중해서 듣는 것도 아니다. 전체의 울림을 듣는 것이 합창을 듣는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성서를 해석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시대적 배경의 소리에만 집중해서도 안 되고, 저자의 의도에만 집중해서도 안 된다. 또한 기록된 시기만을 중요하게 여겨서도 안 된다. 우리가 집중해서 들어야 할 것은 현재 화음을 이루어 부르고 있는 합창의 울림, 여러 과정들을 거쳐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최종 본문의 울림인 것이다. 

이것이 내가 독창보다는 합창을 더 좋아하는 이유이다. 

 

 

나가는 말 : 소리가 울림이 되는 순간, 어울림 

   성서에는 참으로 많은 소리들이 있다. 때로는 그 소리가 불협화음처럼 들릴 때도 있고, 너무 맞지 않아서 도대체 이 소리가 왜 여기에 있나 생각할 때가 있다. 그래서 성서학자들은 이 불협화음의 원인을 찾아내려고 엄청난 시간과 공을 들여왔다. 때로는 저작 시기를 찾으면서, 역사적인 문헌들을 살피면서, 원본 형태를 찾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성서는 뭔가 불완전하고, 허점 투성인 것 같은 느낌이 더해갔다. 하지만 이런 역사 비평적 통시적인 방법에서 공시적인 방법으로 넘어감으로써 소리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울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바로 소리가 울림이 되는 순간이다. 소리만 집중해서 볼 때에는 불협화음처럼 들렸지만 그 소리도 하나의 울림 안에서는 멋진 역할을 감당한다. 너무 맞지 않아 버릴 수밖에 없는 소리들도 울림 안에서는 각각의 역할을 해내게 된다. 격투기 선수의 소리와 개그맨의 소리가 합쳐져 하나의 울림을 만들어 낸 것처럼 전혀 맞지 않은 성서의 소리들이 어우러져 어울림이 되는 것이다. 

   설교자로서 선다는 것은 어쩌면 합창단의 지휘자로 선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각각의 소리들을 모아 하나의 아름다운 울림으로 만드는 것, 성도들로 하여금 성서의 참 울림을 듣게 하는 것, 이것이 설교자의 역할인 것이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이 있다. 각각의 소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결코 울림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설교의 초년병이라고 할 수 있는 지금 시기에 절대로 소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각각의 소리를 자세히 들어보자. 그리고 그 소리도 한 번씩 내보자. 독창의 소리 <없이> 합창의 울림은 나올 수 없다. 독창의 소리를 <넘을 때> 진정한 합창의 울림이 나오는 것이다. 소리가 울림이 되는 순간, 그 어울림의 순간에 내가 꼭 있길 바란다. 

 

이것이 내가 독창보다 합창을 더 좋아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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