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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구약 성경

창세기 39장 주해

by 보통목사 2022.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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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9:1-23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

하나님을 <삶에 모심>

 

 

1. 맥락 파악하기

본문은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 중에 속해있다. 요셉의 이야기 중에 본문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해서 망원경으로 보기도 하고 돋보기로도 보겠다.

 

1) 망원경 보기 : 37-50장에서 39장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

 

<요셉 이야기의 구조>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다 37:2-36

다말과 유다 38:1-30

A. 요셉과 보디발 39:1-20

B. 감옥에 갇힌 요셉 39:21-40:23

C. 왕궁의 요셉 41:1-57

A'. 요셉 가족의 일차 애굽 방문 42:1-38

B'. 요셉 가족의 이차 애굽 방문 43:1-45:28

C'. 요셉 가족의 삼차 애굽 방문 46:1-47:31

야곱과 요셉의 임종 48:1-50:26

 

요셉이 겪은 3번의 일을, 요셉 가족의 3차 방문으로 대구를 이룬 구조이다.

  

2) 망원경 보기 : 37-50장에서 39장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

본문을 이끌어가는 주어를 근거로 나눠볼 수 있다.

 

A. 37:1-41:57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내려온 요셉 이야기

애굽 땅에 내려간 요셉의 이야기

B. 42:1-47:27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내려온 야곱 이야기

가나안 땅에 머물러 있는 가족, 애굽 땅에 음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가나안 땅에 살던 야곱의 식구들이 애굽의 고센 땅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였다.

C. 47:28-50:25 애굽에서 사는 야곱과 그의 가족 이야기

 

요셉과 야곱, 그리고 야곱과 그의 가족의 이야기로 구분할 수 있다. 위에서 보다시피 39장은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내려온 요셉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3) 망원경 보기 : 37-41장에서 39장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

37장에서 41장까지를 나누는 근거를 찾아보고, 서로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구 분 37:1-40:23 41:1-57
37:1-11(두 가지의 꿈) 바로의 꿈 2가지
요셉의 위치 시간의 경과에 따라 잊혀짐 시간의 경과에 따라 다시 기억이 나고, 세상의 중심이 됨
내려간/올라간 이야기 <내려간 이야기>
구덩이에 빠진 요셉
(양-구덩이-애굽)
감옥에 떨어진 요셉
(보디발의 집 - 감옥)
<올라간 이야기 >
단번의 총리가 됨
단번에 두 아들을 얻게 됨
성적이 유혹에 대한 반응 유다의 죄 요셉이 무죄
옷의 변화 채색옷 - 노예옷 - 죄수복 세마포옷

 

4) 돋보기 보기 : 37장과 38장의 비교

39장을 자세히 살펴보기에 앞서서, 요셉의 이야기 중에서 38장이 가지고 있는 위치와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38장이 후대의 첨가이거나 요셉의 이야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야기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37장과 39장에 있는 요셉의 이야기 사이에 있는 38장의 유다와 다말 이야기는, 요셉의 이야기를 읽어가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먼저는 37장과 38장을 비교함으로 38장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먼저 38장에 대한 구조는 아래와 같다.

 

포컬만(Fokkelman)의 구조

A. 유다의 이방 여자와 결혼과 세 아들 탄생(창 38:1-5)

B. 두 아들의 죽음에 대한 아픔(창 38:6-10)

C. 애도 후에 명절 때, 히라와 함께 딤나로 감(창 38:11)

D. 다말, 과부의 옷을 벗고 베일로 얼굴 가림(창 38:12-13)

E. 성적 욕구 그리고 다말을 창녀로 착각(창 38:14)

X. 중심:다말의 보상과 조약물(창 38:16-18)

E'. 성관계 그리고 다말의 임신(창 38:18)

D'. 다말, 베일을 벗고 과부의 옷을 입음(창 38:19)

C'. 히라를 보낸 후,창녀를 찾지만 헛수고(창 38:20-23)

B'. 다말의 죽음 위협:다말이 옳다(창 38:24-26)

A'. 다말이 쌍둥이를 낳음(창 38:27-30)

 

37장 38장
1절, 그 후에 (시간상의 전후 맥락)
요셉이 팔린 직후를 말한다. 적게는 22년 정도 차이 나는 시간을 본문은 요셉이 애굽에 팔린 직후와 보디발에게 넘겨지기 전 시간적 차이를 두면서, 긴 세월의 유다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 본문은 요셉이 애굽에 팔린 직후와 보디발에게 넘겨지기 전 시간적 차이를 두면서, 긴 세월의 유다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
34-35
요셉의 죽음에 대한 야곱의 슬픔
7-10
유다의 두 아들의 죽음 앞에 무반응
32-33
아들들이 아버지 야곱을 속임
(피에 적신 채색옷)
13-14
며느리 다말이 유다를 속임
(창녀의 옷을 입음)

 

38장과 37장의 이야기를 서로 비교 대조해 보았다. 위에서 보았듯이, 38장은 요셉의 이야기에서 필요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같은 흐름 속에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채색옷을 피에 적셔 아버지를 속인 유다는, 38장에 이르러서 창녀의 옷을 입은 며느리 다말에게 속임을 당한다. 속고 속임의 이야기가 계속되는 것이다. 특히 옷이 반복되는 것은, 옷으로 속인 유다에게 있어서는 큰 깨달음으로 다가왔을 듯하다. 옷으로 속인 유다가 옷으로 속임 당하는 완벽한 대구를 이루고 있는 37장과 38장이다. 다음으로는 38장과 39장의 비교를 통해 더 명확히 39장의 위치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5) 돋보기 보기 : 38장과 39장의 비교

두 이야기가 평행적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다 이야기(38:1-30) 요셉 이야기(39:1-23)
외국 여자와의 교제 (38:1-3) 외국 여자와 거리둠 (39:7-12)
성적 부도덕 (38:12-18) 성적 도덕성 (39:7-12)
희생양을 찾는 자 (38:24) 희생양이 됨 (39:13-20)
하나님의 심판 (38:6-10) 하나님의 복 (39:21-23)
여인의 참된 고소 (38:25) 여인의 잘못된 고소 (39:13-20)
죄의 고백 (38:26) 죄를 거부 (39:10)

유다와 요셉의 대조는, 팔아넘긴 자와 팔린 자와의 대조로도 볼 수 있다. 똑같은 상황에서 서로 다른 행동의 대비를 통해서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후에도 계속 전개하겠지만, 나는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도 했지만, 요셉이 하나님을 <삶에 모심>이 있었기에 같은 환경에서 다른 행동이 나왔다고 보았다. 유다에게는 없었다. 하나님을 자신의 삶에 모시려고 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요셉을 팔아넘길 때부터 시작된 차이였다. 결국에는 이 차이가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38장은 37장과 39장의 요셉 이야기를 연결시켜주는 브리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이러한 이해를 갖고 본문 읽기와 Composition, 그리고 Performing을 해 보도록 하겠다.

  

2. 본문 읽기 (개역개정)

이제 창세기 39장의 본문을 읽어 내려갈 것이다. 우리 조는 앞에서 따로 본문의 어휘를 조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본문 읽기에 꼭 필요한 어휘들만 쓰기 위해서이다. 본문 읽기를 통해 중요 어휘, 혹은 중요 표현들을 정리하는 것으로 하겠다.

 

7절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1) 그 후에 : 직역하면 ‘이 일들 후였다’이다. 특히 본문이 앞부분과 원인 결과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 주는 계속적 ‘바브’로 시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주인의 모든 신뢰를 얻은 후의 일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눈짓하다가 : 눈을 ‘들어 올렸다’라는 뜻이다. 요셉에게 추파를 던지는 보디발의 아내를 잘 표현한 단어이다.

3) 동침하기를 : ‘쉬크바 임미’는 나와 함께 누워라는 뜻인데, 명령형이 사용된다. 이것은 동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유혹이나, 간청의 의미일 뿐만 아니라, 힘 있는 자가 취하는 횡포의 일면도 있음을 보여 준다.

→ 1-6절까지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를 말한다. 그에 반해 7절부터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이 없는 듯이 보인다. 주체가 하나님에서 요셉으로 바뀐 것이다. 그래서 7절 이후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과 많이 닮아 있다. 마치 하나님이 없다고 느껴질 때 말이다.

 

8절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9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요셉은 너무나도 달콤한 유혹을 단칼에 거절한다. ‘마엔’의 강조형 ‘와예마엔’을 쓰고 있는데, 완강히 거절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이 거절한 3가지 이유를 설명한다.

1. 내 주인이 금한 것이 없고, 모든 것을 주었지만 당신만은 금했다.

2. 당신은 그의 아내이다.

3.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짓겠는가?

→ 요셉이 하나님을 <삶에 모시는>것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함께 하시기도 했지만, 또한 응답 적으로 하나님을 삶에 모시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것 같은 유혹의 순간에서 하나님 앞에 선 것이다. 하나님을 삶에 모셔온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단칼에 거절할 수 있었다.

12절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

1) 나와 동침하자 : 그녀는 처음에는 눈짓만 하다가(7절), 그 후 처음으로 요셉에게 동침을 요구하고(7절), 그다음부터는 매일 동침을 요구하다가(10절), 드디어 요셉의 옷을 붙잡는 격렬한 육체적인 행귀까지 행하였다. 또한 7절의 명령형과는 달리 청유형으로 유혹하고 있다.

2) 버리고 : ‘아조브’라는 말은 완전한 단절을 뜻하는 말이다. 시편에서 자신을 버리는 단어로 사용한 뜻이다. 이것은 38장의 유다와 다말 사건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유혹에 완벽하게 넘어간 유다와 유혹과 완벽하게 단절한 요셉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20절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21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눈에 띄는 문장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이다. 39장 2절에도 동일하게 나와 있다. 한 가지 독특한 점은 7-18절까지는 여호와께서 함께하시고라는 말이 나오지 않고, 그 앞과 뒤에만 나온다는 것이다. 정작 하나님의 개입이 가장 필요한 유혹의 순간에 하나님의 개입이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의문을 <함께 하심> <삶에 모심>으로 풀었다. 37장과 38장의 사건들을 보면서 깨닫게 된 것은, 하나님을 <삶에 모심>의 형태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야곱의 아들들이 그러했고, 유다가 그러했다. 물론 그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함께 하셔서, 요셉을 인도하셨고, 다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오르기 까기 했다. 그러나 그 둘에게는 하나님을 <삶에 모시는> 모습이 없었다. 그에 반해,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하시기도 했지만, 하나님을 삶에 모시기도 했다. 하나님을 삶에 모신 자에게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더욱 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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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Composition

Ⅰ.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 39:1-6
Ⅱ. 여호와를 <삶에 모십> 39:7-18
Ⅰ’여호와께서 <함께 하심> 39:19-23

  

4. Performing : 단락과 단락 사이 묻기

 

1) 이 본문은 크게 세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다. 나누는 근거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심과 하나님을 삶에 모심이다. Ⅰ과 Ⅰ’에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이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나온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분명히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Ⅱ에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이라는 직접적인 언급이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은 어디에도 언급함이 없고 오직 보디발의 아내와 요셉의 이야기만 나온다. 바로 요셉의 하루하루의 <>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요셉은 자신의 삶에 하나님을 모신다.

 

2) Ⅰ단락에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강조한다. 2절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라고 나온다. 형통이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형통은 우리가 생각하는 데로, 잘 먹고 잘 사는 개념이 아니다. 왜냐하면 후에 감옥에서도 형통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형통은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과 하나님을 <삶에 모심>인 것이다. 바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그 삶 자체가 형통한 삶이라는 것이다. 또한, 형통의 하나의 특징이 더 있는데, 그것은 형통한 삶을 통하여 주위의 사람들이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요셉이라는 사람의 형통함 때문에, 보디발이 복을 받았다.

 

3) Ⅱ단락에서는 마치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실제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은 드러나 있지 않다. 수많은 유혹에도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시지 않는 것이다. 대신에 7-18절은 요셉이 하나님을 <삶에 모시는> 단락이다. 이 단락은 37, 38장과 구별되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야곱의 자식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팔아넘기는 삶의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 않았다. 그리고 유다 또한 다말을 범하는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모시지 않았다. 앞의 맥락 파악에서 37장과 38장을 비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요셉은 달랐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자신을 유혹하는 삶의 자리에 하나님을 모셨다. 9절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요셉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하나님을 자신의 삶의 자리에 모시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다시 억울한 일을 당하여 감옥에 갇혔을 때에서 조차도, 불평과 절망보다는 다시 그 감옥이라는 삶에 하나님을 모셨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창세기 39장이 주는 메시지는 오늘날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우리는 무조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만 믿고, 자신의 삶에는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다. 그래서 유다와 같은 잘못을 저지를 때가 많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과 더불어 하나님을 삶에 모시는 것! 요셉의 삶이 주는 귀한 깨달음이다.

 

4) Ⅰ’는 다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나온다. 비록 감옥이었지만, 요셉의 삶은 여전히 형통했다. 23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감옥과 형통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성경은 그것이 형통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 하나님을 삶에 모시는 삶. 그것이 바로 형통한 삶인 것이다. 40장에서는 다시 하나님을 자신의 삶에 모시는 요셉의 이야기가 나온다. 40장 8절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5.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까?> 그럼, 하나님을 <삶에 모십시오.>

 

창세기 39장은 늘 들어왔던 말씀이고, 어렸을 때부터 내용을 외우다시피 보았던 말씀이지만 오늘에서야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 이유는 맥락 속에서 읽었기 때문이다. 왕대일 교수님께서 왜 37장, 38장과 비교하여 읽으라고 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보통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에 초점을 둔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에 애굽의 총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당장에 이런 의문이 든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았나? 그리고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에게 유혹을 당하던 그 순간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나?라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의문과 궁금증을 바로 하나님을 <삶에 모심>이라는 것으로 살펴보았다. 37장의 야곱의 아들들과 38절의 유다에게 없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그들의 삶에 하나님을 모시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정작 하나님을 자신의 삶에 모시지 못했던 것이다. 37장에서 요셉을 팔아넘기려던 삶의 순간에 그러지 못했고, 38장에 다말을 범하는 삶의 순간에 그러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

우리 인생에서 분명히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과 같은 순간이 있을 것이다. 무엇을 해도 이상하게 잘 되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오해받지 않고, 잘 먹고 잘 살게 되는 순간들 말이다. 나는 그냥 그 자리에 갔을 뿐인데, 주위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되고 행복해하는 일들 말이다.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지 모른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39장 1절부터 6절까지의 요셉이 이런 마음이지 않았을까 싶다. 장군의 집에 종으로 들어간 요셉이, 그 집의 모든 것을 다 관리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일들이 분명히 우리 인생에서도 크고, 작게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을 삶에 모심

하지만 분명히 우리 인생에는 6-18절과 같은 순간들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과 같은 순간들 말이다. 사실 우리의 믿음이 빛나는 순간이 바로 이 시기이다. 요셉이 그러했다. 11절과 같이 그 집 사람들은 하나도 거기 없는 것과 같은 순간에서도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자신의 삶에 모시는 것이다. 요셉이 겪는 유혹을 대수롭게 생각하면 오산이다. 요셉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보디발의 아내를 범할 수 있는 상황에 있던 것이다. 성적인 유혹이 얼마나 물리치지 어려운 일인지는 38장의 유다와 다말 사건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유혹의 상황에서 요셉은 하나님을 <삶에 모시는> 선택을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유혹에 넘어지지 않았다. 모든 순간에 하나님을 삶에 모시는 것,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이자 능력인 것이다.

창세기 39장을 읽고 있으면 마치 민요에서 <메기고 받는> 장면이 떠오른다. 메기고 받는 형식이란 한 사람이 소리를 ‘메기면’여러 사람이 그 소리를 ‘받아서’ 노래하는 것을 뜻한다. 바로 하나님과 요셉이 즐겁게 메기고 받는 노래가 39장 전체를 울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면>, 요셉은 하나님을 <삶에 모신다.> 그리고 요셉이 하나님을 <삶에 모시면>.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함께 하신다.> 이런 흥겨운 메기고 받음이 계속되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에도 이러한 메기고 받음이 울려나 길 소망한다. 하나님만 메기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대로 하나님께만 메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메기시면 내가 받고, 내가 메기면 하나님 받으시는 멋진 가락이 우리의 삶에서도 울려나 길 소망한다.

 

참고문헌

1. 천사무엘,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념 기념 성서주석 : 창세기2』, (대한기독교서회, 2001)

2. Wenham, Gordon J 저, 『창세기 2』, 박영호 옮김, (솔로몬, 2001)

3. 목회와 편집부 엮음, 『창세기 :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두란노, 2003)

4. 왕대일, 『구약신학』, (감신대성서학연구소, 2010)

5.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창세기>, 성서교재(주)

6. 유진 피터슨, 『메시지 : 모세오경』, (복 있는 사람, 2011)

7. 존 H.월튼,『NIV 적용주석 창세기』,(서울:성서유니온선교회, 2007)

8. 리차드 프랫,『구약의 내러티브 해석』,(기독교문서 선교회,2007)

9. 김학진, 『유다와 다말 내러티브의 문예적분석과 통일성연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논문, 2011

10. 이창훈, 『창세기 38장에 관한 연구』,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석사논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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