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9:1-27
야곱의 유(遺)언
야훼의 뉴New언
1. 맥락 파악하기
본문은 창세기의 야곱 이야기 중에 속해있다. 야곱의 이야기 중에 본문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해서 망원경으로 보기도 하고 돋보기로도 보겠다.
1) 망원경 보기: 37장과 50장에서의 49장의 위치 : 렌즈버그의 대칭구조
A 요셉과 그의 형제들, 야곱과 요셉 부분 37장
B 간주곡: 요셉이 나타나지 않음 38장
C 역전: 요셉의 범죄, 보디발의 아내 39장
D 이집트에서의 요셉의 영향 40:1-41:57
E 이집트로의 두 여행 42:1-43:34
F 마지막 시험 44:1-34
F' 시험에 대한 결론 45:1-28
E' 이집트 이주에 대한 두 개의 말들 46:28-48:22
D' 이집트에서의 요셉이 영웅 47:13-27
C' 역전: 장남 에브라임과 차남 므낫세 47:28-48:22
B' 간주곡: 요셉이 명목상 나타남 49: 1-28
A' 요셉과 그의 형제들, 야곱과 요셉의 부분 49:29-50:26
→ 렌즈버그는 ‘요셉과 그의 형제들’을 표제로 삼아서 전체 구조를 대칭구조로 처음으로 제안
한 학자이다. 그러나 그가 전체구조를 분석하면서 유다에 관한 삶의 모티프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주목해야 할 점은 처음과 끝 부분에서 요셉과 그의 형제들 그리고 야곱과 요셉과의 관계를 구조의 단위로 삼아 대칭구조로 연결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연결은 창세기 37-50장을 전체로 볼 수 있는 강점이 있다. 이런 구조 안에서 오늘의 본문은 요셉이 명목상으로 나타난 간주곡으로 분류되고 있다.
2) 망원경 보기 : 37장과 50장에서의 49장의 위치 : 가레트의 대칭구조
A 요셉에 대한 형제들의 적대감 37:3-11
B 요셉의 표면적인 죽음, 야곱의 슬픔 37:12-36
C 유다와 다말 38:1-26
D 불공평한 역전들 38:27-39:23
Da 베레스와 세라 38:27-30
Db 보디발의 아내와 요셉 39:1-23
E 요셉의 지혜 40:1-42:57
F 이집트로의 이동 42:1-46:7
Fa 야곱이 형제들을 보냄/형제들이 위협 받음 42:1-43:34
야곱이 두 번째 여행에 베냐민을 보냄
Fb 형제들이 요셉에 의해 속음
요셉이 자신을 나타냄 44:1-45:28
Fc 야곱이 라암세스로 이동 46:1-7
G 계보 연구 46:8-27
F' 이집트에서 정착 46:28-47:11
Fa' 야곱이 이집트에 도착, 그러나 유다를 먼저 보냄
Fb' 요셉이 야곱을 환영, 바로에게 그를 소개
Fc' 야곱이 라메스로 이동
E' 요셉의 지혜 47:13-26
D' 불공평한 역전들 48:1-22
Da 야곱이 요셉을 사랑
Db 에브라임 므낫세
C' 유다에 대한 아이러니한 축복 49:8-12
B' 야곱의 죽음, 요셉이 그를 장사 지냄 49:20-50:14
A' 요셉이 형제들을 안심시킴 50:15-2
3) 망원경 보기 : 47-50장에서 49장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
I. 야곱의 이야기 47:28-50:21
A. 사건의 배경 47:28-31
B. 야곱의 유언과 죽음 48:1-50:21
II. 요셉의 이야기 50:22-26
A. 요셉의 유언 50:22-24
B. 요셉의 죽음 50:25-26
야곱의 이야기와 요셉의 이야기 가운데 야곱의 이야기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유언과 죽음이다. 임종을 앞둔 유언의 중요성은 노아, 이삭,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 등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4) 망원경 보기 : 49-50장에서 49장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
Ⅰ. 야곱의 예언/축복 49:1-28
A. 레아에게서 낳은 여섯 아들 : 르우벤, 유다 등 49:3-16
B. 빌하에게서 낳은 아들 : 단 49:16-18
C. 실바에게서 낳은 아들 : 갓 49:19
C'. 실바에게서 낳은 아들 : 아셀 49:20
B'. 빌하에게서 낳은 아들 : 납달리 49:21
A'. 라헬에게서 낳은 두 아들 : 요셉, 베냐민 49:21-27
Ⅱ. 야곱의 죽음과 장사 49:29-50:14
A. 야곱의 명령 49:29-33
A'. 요셉의 순종 50:1-14
Ⅲ. 화해의 확인 50:15-21
A. 용서의 요청 50:15-18
A'. 용서의 확인 50:19-21
Ⅳ. 요셉의 유언과 죽음 50:22-26
→ 본문은 위의 구조가 보여 주는 대로 치밀한 구성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구성과 배열은 야곱을 공통 조상으로 가진 열두 지파의 단일성과 조화를 나타내는 듯하다. 이 야곱의 유언은 족장 시대를 마감하면서 가나안 정착 시대를 바라보게 한다. 야곱의 죽음과 장사(49:29-50:14)는 구약에서 흔히 사용되는 ‘명령-순종’의 패턴을 따라 구성되었다. 이와 비슷하게 화해의 확인(50:15-21)도 형제들이 화해를 요청하고 요셉이 이에 응답하는 논리로 구성되어 있다. 요셉의 유언(50:22-26)도 이행을 기다린다. 이처럼 야곱의 예언과 축복의 이야기는 49장부터 창세기의 마지막을 이끄는 서두이자 머리말인 것이다.
5) 돋보기 보기 : 49장은 축복인가? 유언인가?
창세기 49장의 장르에 대한 여러 의견들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인 축복과 유언인데, 이 번 돋보기 보기를 통해서 창세기의 장르가 축복인지, 유언인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유언으로서의 창세기 N. M. Sarna와 G. J. Wenham
창세기 49장을 단일체가 아닌, 부족들에 대한 격언의 모음집으로 생각하였던 Sarna는 창세기 49장을 유언으로 정의하였다. 이 텍스트는 축복과 저주, 비난과 칭찬, 지리적이고 역사적인 관찰 등 매우 혼합된 성질들의 재료를 포함한다. 이런 이유로 야곱의 유언으로서 명명이 문맥에 더 잘 어울릴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Wenham도 49장을 유언으로 정의하는 것에 동의한다. Sarna의 의견과 마찬 가지로 족장의 마지막 말은 축복만이 아니라 저주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Wenham은 또한 이 유언과 창세기 앞부분의 관계를 언급한다. 탄생 설화 (29:32-, 30:24, 35:18)에서 이름의 순서, 르우벤, 시몬, 레위에 대한 비난(34,35:22), 창세기 29-50에서 핵심 역할을 한 네 명의 아들의 이름을 설명한 ‘야훼’의 이름으로 된 참조가 있다는 사실(29:32-35; 30-24)들이 거칠게 일치한다는 점을 들어 설명한다. 이 점들은 창세기 49장이 창세기 안으로 잘 통합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2) 축복으로서의 49장 : H. Pehlke
그는 창세기 49장에 대한 유언적 장르의 구분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명확한 기준을 충분히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창세기 49장을 축복으로 제한한다. 그는 고대 근동 전체에 걸쳐서 축복과 저주는 같은 문맥에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창세기에 다른 축복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9:25-27; 21:1-3;17:20-21; 26:3-5, 24; 25:27-34)고 말한다. 그는 창세기 49장은 그의 조상 아브라함의 축복의 연장으로서 그의 아들들에게 축복과 심판을 전달하는 나이 든 족장의 절박한 죽음이다라고 표현한다.
→ 유언과 축복 둘 다라고 볼 수 있겠지만, 이번 페이퍼에서는 특별히 유언의 입장에서 논
지를 발전시키겠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축복이라고 하기에는 저주의 말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실 수 있다. 그러나 최종 텍스트를 읽어 내려갈 때, 이 본문을 축복으로 한정 짓기보다는 유언이라는 큰 틀 안에서 살펴보는 것이 더 타당성이 있다. 앞으로 이런 유언의 관점에서 본문을 읽어 내려갈 것이다.
6) 돋보기 보기 : 창세기 35장과 49장의 비교
35장 | 49장 |
레아 : 르우벤 - 시므온 - 레위 - 유다 - 잇사갈 - 스불론 | 레아 : 르우벤 - 시므온 - 레위 - 유다 - 스불론 - 잇사갈 |
라헬 : 요셉 - 베냐민 | 빌하 - 실바 : 단 - 갓 |
빌하 : 단 - 납달리 | 실바 - 빌하 : 아셀 - 납달리 |
실바 : 갓 - 아셀 | 라헬 : 요셉 - 베냐민 |
2. 본문 읽기 (개역개정 / NIV)
이제 창세기 49장의 본문을 읽어 내려갈 것이다. 우리 조는 앞에서 따로 본문의 어휘를 조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본문 읽기에 꼭 필요한 어휘들만 쓰기 위해서이다. 본문 읽기를 통해 중요 어휘, 혹은 중요 표현들을 정리하는 것으로 하겠다.
1절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Then Jacob called for his sons and said: "Gather around so I can tell you what will happen to you in days to come.
1) 49장의 처음은 ‘와우’ 계속 법으로 시작한다. NIV로 보면 ‘Then'으로 시작한다. 이는 야
곱이 앞장에서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대한 축복을 마치자마자 바로 아들들을 소집했음을 보여 준다. 본문은 육체적으로는 비록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쇠약한 자였으나 언약의 계승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직무를 열심히 수행하는 야곱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2절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
"Assemble and listen, sons of Jacob; listen to your father Israel.
1) 들으라(에쉬므우) : 들으라는 단순히 듣는 것뿐 아니라 들은 바를 바로 깨닫고, 준행하는
것까지 가리키는 ‘솨마’의 명령형이다. 그런데 이런 명령형이 2번 강조될 때 그 강조점은 뒷부분에 있다. 단순히 모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여서 듣고 순종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2) 본문에는 야곱과 이스라엘의 이름이 동시에 나온다. 이것은 이 유언을 듣는 자녀들이 일차
적으로는 육적인 야곱의 아들들이지만, 더 나아가서는 언약의 계승자인 이스라엘의 아들임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3절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Reuben, you are my firstborn, my might, the first sign of my strength, excelling in honor, excelling in power.
1) 르우벤의 축복에는 ‘기력의 시작’‘위풍이 월등’‘권능이 탁월’등의 단어를 쓴다. 실
제로 르우벤은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했을 때 동생들을 설득하여 그의 생명을 구했으며(37:21,22) 또한 흉년으로 야곱의 가족 전체가 위기를 맞았을 때 아버지 야곱을 설득하기 위하여 자기희생을 감내하는 제안을 했다.(42:37)
4절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Turbulent as the waters, you will no longer excel, for you went up onto your father's bed, onto my couch and defiled it.
1) 끓음(파하즈) :‘파하즈’는 음탕하다, 경박하다, 경솔하다라는 뜻을 지는 동사 ‘파하즈’
에서 유래한 단어로 ‘음탕’.‘변덕’,‘경박’이라는 뜻을 지닌다. NIV에서는 ‘turblent(휘몰아치는, 몸시거친)’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충동적이고 음창한 성격을 말하고 있다.
2) 더럽혔음(힐랄르타) : 장자권 상실의 이유는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기 때문이다. 그
는 그의 시모 빌하와 통간하였다.‘힐랄르타’는 ‘할랄’의 피엘형으로 쓰였으며, 이때 이 단어는 ‘음행하다’(레 19:8), 종교적으로 ‘더럽히다’, ‘모욕하다’라는 뜻을 지닌다. 어원에서 볼 수 있듯이 르우벤의 이러한 범죄는 단순히 그의 아버지 야곱에 대한 모독과 배신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무너뜨리는 종교적인 신성 모독 행위였다.
3) 그 : 지금까지 ‘너’라고 하는 2인칭을 사용하던 야곱은 여기서 ‘그’라고 하는 3인칭으로 그 행위자의 인칭을 바꿔버린다. 야곱의 마음이 조금은 느껴지는 대목이다.
5절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Simeon and Levi are brothers-- their swords are weapons of violence.
1) 형제 : 형제에 해당하는 ‘아흐’는 혈통적인 형제뿐만 아니라 성격이나 행동이 유사한 사람들을 가리킬 때도 사용된 말이다.(욥 30:29) 시므온과 레위는 모두 레아에게서 난 친형제이기도 했지만 기질과 성격이 유사하다는 측면에서도 형제였다. 야곱은 그들이 누이 디나가 강간당한 일을 복수하기 위해 세겜 사람들을 속이고 몰살시켰던 일의 공범자였음을 지적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했다.(34:35)
7절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Cursed be their anger, so fierce, and their fury, so cruel! I will scatter them in Jacob and disperse them in Israel.
1) 이 본문의 동사는 모두 1인칭으로 쓰여졌다. 그 이유는 야곱이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예언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즉 그의 모든 예언이 야곱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므로 반드시 성취될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실제로 이 예언은 성취되었는데 시므온 지파는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행한 제2차 인구 조사에서 유다 지파의 삼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는 22,000명에 불과했으며(민 26:14), 그 결과 다른 지파들처럼 독자적인 기업을 얻지 못하고 유다 지파 중에서 몇몇 성읍만을 할당받게 되었다. 레위 지파 역시 한 지파로서 독자적인 기업을 얻지 못하고 이스라엘 각 지파의 영토에 흩어져서 살아야만 했다.
→ 야곱의 유언은 곧 하나니의 새 언약의 말씀이기도 했다. 실제로 야곱이 유언한 모든 일들
이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성경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야곱의 마지막 말들은, 곧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의 시작을 알리는 말이 될 수 있다.
12절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
His eyes will be darker than wine, his teeth whiter than milk.
1) 본절은 대칭적 반복법을 사용한 문장 구조를 통해 운율을 살리며, 또한 그 뜻을 강조한다.
본문의 ‘그 이(쉰나임)’는 ‘그 눈(에나임)’과 대칭을, ‘우유로 인하여(메할라브)’는 ‘포도주로 인하여(미야인)’와 대칭을 그리고 ‘희리로다(우레벤)’는 앞의 ‘붉겠고(하클릴리)’와 완벽한 대칭을 이룬다.
16절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Dan will provide justice for his people as one of the tribes of Israel.
1) 단 : ‘단’은‘심판하다’,‘판단하다’라는 뜻을 지닌 ‘띤’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재판관’이란 뜻이 있다. 그런데 본문은 ‘단’지파의 미래를 바로 이 ‘딴’과 동일 어근을 갖는 ‘야딘’즉 ‘심판하리로다’라는 말로써 예언하고 있다. 이 예언은 재판관이며 동시에 통치자의 역할을 하였던 사사‘삼손’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삼손은 ‘나실인’으로서 20여 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고 통치했다. (삿 16:31)
→ 여기에서도 역시 야곱의 유언이 성취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람이 남기는 유언은 자신
의 바람이나 부탁이 되지만, 하나님의 New언으로 쓰임 받게 되면, 그 유언은 반드시 성취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New언을 새롭게 들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야곱의 유언이라기보다는 야훼의 New언이다.
18절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I look for your deliverance, O LORD.
1) 이 본문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 혹자는 야곱이 예언을 하던 중 기력이 갑자기 떨어지자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으로 알고 이 유언을 마칠 때까지 기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구한 것이라고 했다(Tuch). 또 다른 사람들은 이미 예언한 단 지파의 타락으로부터 자신의 자손을 지켜 주실 것을 간구한 것으로 보기도 했다.(Calvin)
→ 내가 파악한 이 구절의 의미는 6a와 비교해서 말해볼 수 있는데, 저주 후에는 이러한 야곱의 고백이 나옴을 볼 수 있다. 먼저 르우벤과 시므온 그리고 레위를 향한 저주 후, 6절에서 야곱은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리고 그 구절 후에는 유다의 축복이 나옴을 살펴볼 수 있다. 다음으로 17절에서 단 지파를 뱀과 독사와 비유하고 난 후, 이어서 18절에 야곱은 위와 같은 말을 한다. 이 말은 야곱의 혼잣말일 수도 있겠지만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었다는 전제 하에 생각해 보면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고백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는 방법은 바로 죄의 길에서 떠나 주의 구원을 기다리는 데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6a와 18절에서 나온 야곱의 고백은 이스라엘 모두의 고백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이 고백은 오늘날 ‘새 이스라엘’인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22절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Joseph is a fruitful vine, a fruitful vine near a spring, whose branches climb over a wall.
1) 요셉 : ‘요쎄프’는 더하다, 첨가하다라는 뜻을 가진 ‘야싸프’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그가 더하실 것이다’라는 뜻이다. 야곱은 요셉의 이름처럼 요셉에게 다산과 풍요를 축복했다.
2) 가지 : 가지에 해당하는 ‘뺀’은 일차적으로 ‘아들’,‘자손’이라는 뜻이고 ‘무성한’에 해당하는 ‘포라트’는 ‘열매를 맺다’,‘번성하다’라는 뜻을 지는 ‘파라’의 능동 분사형이다. 그러므로 ‘무성한 가지’란 ‘열매를 많이 맺는 가지’이며 ‘번창하는 자손’이라는 뜻이다. 이는 요셉 자손의 다산과 풍요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요셉에 대한 예언은 먼저 그 자신에게서, 그리고 북왕조의 주축인 그의 아들 에브라임 지파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위치가 그들에게 유달리 강한 자부심을 불러일으켰는데, 이 땜누에 그들은 다른 지파들, 특히 유다 지파와 충돌하여 통일왕국이 분열하는 근본 원인을 제공하였고, 후에는 앗수르에 망한다.
24절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But his bow remained steady, his strong arms stayed limber, because of the hand of the Mighty One of Jacob, because of the Shepherd, the Rock of Israel,
본문을 원어를 보고 더 정확하게 해석을 하면 ‘이스라엘의 반석 되신 목자로부터 요셉의 힘이 나온다’는 뜻이다. NIV본문을 보면 더 이해가 쉽다.(because of the Shepherd, the Rock of Israel) 라고 번역했다.
→ 요셉 지파의 축복의 이유가 요셉 지파의 능력이나 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로 인한 축복임을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야훼가 아니면 요셉 지파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말은 다른 지파에게도 공히 적용되는 말씀일 것이다. 비록 저주를 받은 지파라 할지라도 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붙드는 자들에게는 축복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3. Composition / 수사학
3.1 레아 - 빌하 - 실바 - 실바 - 빌하 - 라헬 순으로 보는 구조
Ⅰ. 유언의 준비 | 49:1-2 | |
Ⅱ. 유언의 내용 | 49:3-27 | |
A. 레아에게서 낳은 여섯 아들에 대한 유언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스불론, 잇사갈 |
49:3-15 | |
a. 르우벤 : 저주 | 3-4 | |
b. 시므온과 레위 : 저주 | 5-7 | |
X. 유다 : 장자권 축복 | 8-12 | |
b'. 스불론 : 가벼운 저주 | 13 | |
a'. 잇사갈 : 저주 | 14-15 | |
B. 첩의 자녀들이 낳은 네 아들에게 대한 유언 | 49:21 | |
a. 빌하 - 단 : 축복 | 16-18 | |
b. 실바 - 갓 : 축복 | 19 | |
b'. 실바 - 아셀 : 가벼운 책망 | 20 | |
a'. 빌하 - 납달리 : 축복 | 21 | |
A'. 라헬에게서 낳은 두 아들에 대한 유언 : 요셉, 베냐민 | 49:22-27 | |
a. 라헬 - 요셉 : 장자권 축복 | 22-26 | |
b. 라헬 - 베냐민 : 축복 | 27 |
3.2 Performing _ 단락과 단락 사이 묻기
1) 49장은 야곱의 자녀들의 출생 순으로 되어 있지 않다. 레아와 라헬의 자녀들이 처음과 끝에 배치되어 있고 가운데에 그들의 첩의 자녀들에 대한 유언이 나온다.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 내려갈 때, 배치하게 된 이유와 저자의 의도를 함께 파악하고자 한다.
2) 먼저 A에 대한 구조 분석이다. 레아의 자녀들의 구조로서 중앙이 홀수인 대칭구조로 되어있다. 구조의 특징에 따라 살펴보면, a와 a'는 는 르우벤과 잇사갈이 서로 대칭을 이룬다. 르우벤은 저주를 받지만, 잇사갈은 책망을 받는 내용으로 서로 비교된다. 두 번째와 네 번째 인물 이미지들 b와 b'는 시므온과 레위 그리고 잇사갈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시므온과 레위가 분리되어서 축복이나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니고 모두가 저주를 받지만, 스볼론은 가벼운 저주만 받는다. 특이한 것은 이들의 이름 배열이 태생 순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앙에 위치한 유다는 무려 다섯 절씩이나 축복을 받는다. 구조의 특징상 유다가 중심을 이르고 있음을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배열로 구성되어 있을까? 그리고 왜 스볼론과 잇사갈의 태생 서열이 바뀌었을까? 이러한 대칭구조의 의미는 저자가 레아의 자녀들 중 유다가 약속의 수여자인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르우벤을 대신해서 물려받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이것은 창세기 전반에 흐르고 있는 계승 모티프에서 더욱더 찾아볼 수 있다. 장자가 축복을 받기보다는 그의 동생들 중 특별한 자들로 인해서 순서가 역전되는 것을 본다.
이 점이 위 구조를 형성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여섯 형제 중 장자인 르우벤은 아버지께 죄를 범해서(창세기 35장) 결국 아버지의 신임을 얻지 못했고, 차자와 삼자는 시므온과 레위인데 이들은 세겜 사건에 발목이 잡혀서 아버지께 역시 인정받지 못하고 저주를 받게 된다. 넷째인 유다는 그들과 다르게 다섯 절의 긴 축복을 받는다. 구조의 특징에 따라 중앙이 자연스럽게 유다로 연결된다. 그리고 그의 다섯 절의 축복은 형들의 축복과 비교하면 차별된 축복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구조적 특징들과 주제의 관계 속에서 유다는 아버지의 신임을 받았음을 강조하는데, 유다의 이전 삶에서 그의 변화된 삶과 요셉을 만나게 한 실력이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유다의 다섯 절의 축복들은 스볼론과 잇사갈의 순서가 다른 점에서 더욱 잘 나타난다. 웬엄(Wenham)은 잇사갈이 형인데 뒤에 있고 스볼론이 앞으로 배열된 것에 대해서는 그들의 축복과 비교하여 스볼론의 삶이 더 훌륭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위 인물구조로 볼 때 스볼론과 잇사갈의 축복의 분량이 구조적 입장에서 저주와 책망의 관계를 이룬다. 아무리 형이라도 그들의 삶의 질에 따라 결과가 변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넷째인 유다가 르우벤, 시므온, 그리고 레위의 동생이며 또한 그도 나쁜 짓을 많이 했지만(37, 38장의 유다의 부정적 삶과 역할) 삶의 여정 가운데서 분명한 회개의 열매가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그를 더욱 축복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위 대칭구조의 특징에 따라 유다를 중심으로 두었고 스룰론과 잇사갈의 위치가 바뀌었음을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다.
→ 축복과 저주의 대칭구조를 통해서 저자는 우리에게 단호히 말을 하고 있다. 똑같은 자녀들 가운데에도 분명히 축복과 저주는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상황은 축복의 이유가 태생적 이유(르우벤)가 아님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주어진 능력이나 상황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살려고 애를 썼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아무리 태생적으로 장자의 조건으로 타고났어도 하나님 앞에서 범죄 하면, 장자의 축복도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2번째도 아니고, 3번째도 아니고 4번째였던 유다가 그 축복을 받은 것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도전과 깨달음을 준다.
3) 다음은 B에 대한 구조 분석이다. 라헬의 몸종 빌하와 실바의 자녀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자녀들의 이름 배열 구조를 자세히 살펴보면 앞에서 나타난 첩의 자녀들의 구조와 전혀 다르다. 창세기 35, 36장과 출애굽기 1장의 이름 구조들은 모두가 태생 순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위 구조는 빌하와 실바의 자녀들이 태생 순이 아닌 특별하게 짝수형 대칭구조의 배열순으로 나열되어 있다. a와 a'를 연결 시켜 보면 빌하의 자녀들인 단과 납달리가 자연스럽게 짝을 이룬다. 또한 인물미지들 b와 b'도 연결시키면 갓과 아셀이 태생순으로 잘 연결되면서 실바의 자녀들로 구성된다. 이러한 구조 연결은 사르나(Sarna)가 처음으로 주장하였는데, 저자의 분명한 의도가 있다. 여기서는 태생 순이 아니고 빌하와 실바의 자녀들을 짝수 대칭구조로 나열되었다. 이렇게 레아의 자녀들의 구조가 태생 순으로 되어 있지 않은 점에 대해서 딜만(Dillmann)은 주어진 지파들의 영토 입장에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나열된 순서에 따라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태생 순도 아니고, 또한 지파의 영토 순도 아니라 대칭구조 안에 나타난 축복의 분량을 구조의 요소로 삼았다는 점이다. 창세기 49장에서 아버지 야곱이 자녀들을 축복하고 저주할 때 그들의 과거의 삶을 기준으로 하였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이 믿음의 삶 속에서 얼마든지 변할 수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그래서 야곱 톨레돗의 전체 주제인 ‘야곱의 자녀들의 신앙경주’ 관점에서 49장의 구조가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자의 의도는 첩의 자녀라도 주어진 삶을 통해서 믿음으로 사는 자는 축복을 받을 수는 있다는 것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 점은 차자라도 믿음으로 사는 자는 장자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점과 별반 다를 바 없다.
4) 마지막으로 A'에 대한 구조 분석이다. A'는 태생 순으로 되어 있다. 라헬의 두 자녀에 대한 축복을 분석해 보면, a에 나타난 요셉의 축복이 다섯 절로 되어 있는 반면 b에 나타난 베냐민에 대한 유언은 고작 한 절에 그친다. 이러한 점은 태생순과 더불어 축복의 분량의 관점에서 구조의 요소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요셉은 유다와 같이 다섯 절의 긴 축복을 받지만, 베냐민은 한 절의 축복으로 그친다. 요셉의 이러한 축복은 결코 장자의 명분 때문에 된 것은 아니다. 그의 지난날의 삶에서 의로운 자의 모습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또한 인내하지 못하고 실수한 삶에서 벗어나 믿음으로 회복한 후 더욱 훌륭한 통치자 역할을 잘한 결과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음 장에서 형제들 중 삶의 승자로, 그리고 장자의 축복을 받은 자로 인정받는 모습이 더욱더 자세하게 보여질 것이다.
→ 이와 같이 창세기 49장의 이름 구조들이 축복의 분량과 아내 순을 요소로 해서 구조가 형성되어 있음을 살펴보았다. 레아의 자녀 중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자는 유다며 라헬의 자녀들에서는 요셉이 각각 다섯 절씩이 축복을 받은 자들로 서로 비교된다. 그리고 첩의 자녀들도 그들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대략 1절씩의 축복을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열 두 자녀들 중에서 유다와 요셉이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자가 되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행함에 따른 결과였다. 이러한 축복들은 ‘야곱 톨레돗’에서 펼쳐진 그들의 삶을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구원받은 백성들이 믿음으로 살 때는 하나님의 축복이 보장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한다.
3.3 Message 야곱의 유언, 야훼의 뉴(New)언
오늘 이 본문은 야곱의 유언을 말하고 있다. 야곱이 자신의 생을 마감하면서 자식들에게 마지막 말을 전하고 있다. 보통 유언이라고 하면 자식들에게 바라는 것들을 남긴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보니까 어떻게 살아야겠다 라던지, 이건 좀 하지 말아야겠다 라는 식의 말들이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유언이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우리가 생각하는 형태의 유언을 남기고 있지 않다. 바라는 것을 말하는 대신, 자식들에게 축복과 저주를 말했다. 축복은 이해가 되지만 저주를 남긴다는 것은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던 자식이라고 할지라도 마지막 순간에서까지 그 자식을 저주할 아버지는 없기 때문이다. 심한 저주를 받은 시므온과 레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다른 형제들은 축복을 듬뿍 받는데, 저주를 받는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야곱은 왜 그렇게 저주의 말도 할 수밖에 없었을까?
바로 야곱의 유언은 야곱만의 유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바라고 소망하는 것만을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야곱의 유언은 곧 하나님의 New언 이었다. 바로 아브라함 때부터 야곱 때까지 약속하시고 또 신실하게 그 약속을 성취하신 하나님께서 야곱의 아들들을 향한 또 한 번의 <New>언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저주를 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시므온과 레위는 하나님 앞에서 범죄를 했기 때문이다. 르우벤도 마찬가지이다.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야곱의 유언에는 저주도 담겨 있었던 것이다. 축복과 저주, 책망이 교차 대구적으로 표현된 야곱의 유언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아니,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에게 주는 이 유언은 우리에게 더욱 특별하다. 바로 신실하시고 성실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야곱의 유언은 단순히 자신의 바람을 이야기하는 것을 끝맺음하지 않았다. 그는 성실하시고 약속하시면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남기고, 알려준 것이다.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하는 유언이요, 우리들에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우리 인생 가운데는, 축복의 순간과 같은 때도 있고 책망의 순간과 같은 때도 있고, 저주의 순간과 같은 때도 있다. 그러나 그 순간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야곱의 유언이다. 약속하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이 잊힐 때가 있는가? 이 야곱의 유언을 다시 듣자! 이 야곱의 유언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새롭게 들려주시는 약속과 성취의 말씀(New언)을 듣게 될 것이다.
4. 문예적 형식의 구성
4.1 주어의 변화에 따른 구조 분석
Ⅰ. 유언의 준비 | 49:1-2 | |
Ⅱ. 유언의 내용 | 49:3-27 | |
A. 2,3인칭 주어의 사용(대화) | 49:3-5 | |
B. 1인칭 주어의 사용(독백) | 49:6-7 | |
C. 2,3인칭 주어의 사용(대화) | 49:8-17 | |
B'.1인칭 주어의 사용(독백) | 49:18 | |
A'.2,3인칭 주어의 사용(대화) | 49:19-27 |
4.2 Performing _ 단락과 단락 사이 묻기
1) 유언의 내용은 다시 A-B-C-B'-A'로 나뉠 수 있다. 나누는 근거는 문예적 형식을 따라 나누게 된 것인데, 그중에서도 인칭의 변화에 주목했다. 이 본문에서는 1인칭 2인칭 3인칭의 주어가 다양하게 등장한다. 그중 눈여겨보았던 것은 바로 1인칭으로 쓰인 B와 B'였다. 이 구절이 본문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퍼포밍 작업을 통해서 함께 살펴보겠다.
2) 먼저 A의 내용은 르우벤과 시므온,레위 지파에 대한 책망과 저주가 담겨져 있다. 야곱이 자식들에게 하는 대화체의 어조로 쓰여져 있다. 책망과 저주의 이유와 원인에 대해서 밝히고 있는 것이다.
3) 2,3인칭으로 쓰인 A를 지나 B로 오게 되면 1인칭의 주어가 쓰이게 된다. 야곱 자신이 말하는 부분인데 독백으로 보아도 큰 무리가 없다. 이 독백에서 야곱은 이렇게 말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없음이로다’ 자기 자신에게 한탄조의 어조로 말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내가 이 독백의 어조에 집중했던 이유는 야곱이 이전의 야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야곱은 하나님께 새로운 이름을 받는데, 그 이름은 ‘이스라엘’이다. 그렇다면 지금 야곱의 독백은 곧 이스라엘에게 하는 말과 같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시므온과 레위의 죄들에 대해 다시는 죄짓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온다. 죄를 짓는 모의에 상관하지 말고 그러한 모임에 참여하지 말라는 이스라엘의 고백이자,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또 하나 살펴봐야 할 것은 수사학적 기법으로 야곱의 저주에 대한 해석이다. 본문은 하나의 시의 형태인 것을 앞에서 함께 살펴보았다. 시에는 함축적 의미가 담겨있기 마련이다.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를 향해하는 저주는 무서울 정도로 강도가 세다. 자식에게 말하는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과연 시므온과 레위는 영원히 저주받는 인생이 되는 것인가? 그들의 자손도 그렇게 저주받는 인생으로만 살아가야 하는가? 에 대한 질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의 내용 중에 레위지파의 회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출애굽기 32장에 있는 사건이다. 여기에서 레위는 다시 복을 받게 된다. 그러면 창세기에 나와 있는 야곱의 유언은 거짓이 되는 것인가? 아니다. 도리어 진짜 하나님의 마음을 레위 자손들이 안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아리랑>을 아는가? 노래의 가사를 들어보면 <십리도 가지 못해서 발병 나라!>는 저주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그 가사에 담겨진 의미는 <나를 떠나가지 말라>는 애절함이다. 정말로 발병이 나라는 저주가 아니라, 자신에게 돌아오라는 애절함 부름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읽은 49장의 저주의 본문도 이런 해석이 가능할 수 있다. 자신의 자식에게 맹렬하게 퍼붓는 저주의 말씀은 어쩌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간절한 부르심일 수 있다는 것이다. 출애굽기 본문을 통해서도 살펴보았듯이, 이런 부르심에 응답하게 된 레위 자손은 다시 축복을 받게 된다. 그래서 본문의 저주의 말씀은 우리에게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야곱의 고백, 아니 이스라엘의 고백처럼 죄의 길에서 떠나 하나님을 찾으면 다시 회복시켜 주시고 복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이고 부르심인 것이다.
4) C에서는 많은 부분이 축복의 말씀들이다. 각각의 지파에게 축복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자식들을 태어난 순서대로 기록하지 않은 것은, 필자의 의도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저주와 축복의 극명한 대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6a절의 결단의 고백이 있다. 그러한 고백이 있고 난 후에 쏟아지는 축복의 말씀들은 야곱의 고백으로 인해 더욱 빛이 난다.
5) B'에서 다시 독백이 나온다. 유다의 축복 이후에 등장하는 야곱의 고백이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이 역시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죄의 길에서 떠나 오직 여호와의 구원을 기다리는 삶. 본문은 그것을 우리에게 물어오고 있는 것이다. 저주의 한 복판에서 고백했다면, 축복의 한 복판에서도 동일한 고백을 해야 한다는 이스라엘의 당부, 하나님의 당부로 들려진다. 실제로 이 본문 이후에는 요셉의 축복이 나온다. 유다와 요셉의 축복의 한 복판에 바로 야곱의 고백이 있는 것이다. 아니, 이스라엘의 고백이 있는 것이다. 인칭의 변화와 본문의 구성 위치를 통해서 본문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내게 이런 고백이 있는지 말이다.
4.3 Message _ 저주와 축복의 <한 복판>에서 고백하라!
오늘의 본문에서 눈에 띄는 구절은 6절과 18절이다. 모든 구절이 2인칭 혹은 3인칭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에 반해, 이 구절은 1인칭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구절들은 모두 대화체로 이루어져 있는 것에 반해, 이 구절은 야곱의 독백인 것도 특징이다. 나는 이러한 문예적 형식이 말하는 메시지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본문의 이야기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이 내게 말을 걸어오도록 길고 진지하게 본문을 분석했다. 그 결과 내게 주신 깨달음은 6절과 18절의 야곱의 고백은, 아니 이스라엘의 고백은 바로 저주와 축복의 한 복판이었다는 것이다. 먼저 6절은 저주의 한 복판에서의 고백이다. 시므온과 레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저주가 퍼부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야곱은 이렇게 고백한다.
6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저주의 한 복판에 절대로 죄와 타협하지도 않고, 참여하지도 않겠다는 고백이 나온다.
저주의 한 복판에서 고백하라!
우리의 삶 가운데 시므온과 레위와 같은 죄를 짓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순간적인 욕망과 충동에 의해 저지르는 죄들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죄들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게 마련이다. 저주와도 같은 대가들이 내 삶에 멍에처럼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그때가 바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때라는 것이다. 저주의 한 복판에 있다고 너무 낙심하지 말자. 왜냐하면 하나님의 저주는 우리를 죽이기 위함이 아니요, 우리를 살리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하나님을 우리를 향한 아리랑을 부르고 계신다. 레위의 자손들처럼 주저하지 말고 하나님 편에 서라. 저주를 축복으로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맛보게 될 것이다.
축복의 한 복판에서 고백하라!
우리의 삶 가운데 유다와 요셉과 같은 축복의 순간이 올 때가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잘 풀리고 복에 복을 더하시는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순간들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축복의 한 복판에도 하나님을 구하는 고백 있어야 한다. 유다와 요셉의 축복 가운데 드렸던, 이스라엘의 고백처럼 말이다.
18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저주의 한 복판보다 축복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을 잊기가 쉽다. 그러나 오늘 야곱은 이스라엘에게 축복의 한 복판에서도 하나님께 고백하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민족을 살펴보면, 어려울 때보다 부강하고 축복 가운데에 있을 때 죄를 범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저주의 순간만큼 아니 그보다 더, 축복의 순간에 하나님을 찾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창세기의 마지막을 닫는 요셉의 유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귀하다. 특히, 야곱의 1인칭의 고백은 고난과 축복이 뒤엉키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는 깨달음이 크다. 모든 순간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라. 그리고 하나님께 고백하라. 이것이 야곱의 유언이고, 하나님의 New언이다.
참고문헌
1. 천사무엘,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념 기념 성서주석 : 창세기2』,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2001)
2. Wenham, Gordon J 저, 『창세기 2』, 박영호 옮김, (서울 : 솔로몬, 2001)
3. 목회와 편집부 엮음, 『창세기 :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서울 : 두란노, 2003)
4. 왕대일, 『구약신학』, (서울 : 감신대성서학연구소, 2010)
5.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창세기>, 성서교재(주)
6. 유진 피터슨, 『메시지 : 모세오경』, (서울 : 복 있는 사람, 2011)
7. 왕대일, <세계의 신학> 다시 읽는 야곱-에서 이야기, 한국기독교연구소, 1991, pp. 75-76
8. 김영호, “인물구조로 본 ‘야곱 톨레돗’(창세기 37:2-50-26) : 야곱 자녀들의 신앙경주,
(한영신학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0)
9. 유슬기, “창세기 49장 1-28절 야곱의 유언에 대한 문학적 해석”,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2011),
10. 한수은, “창 49:1-27에 나타난 지파 신탁 연구”,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 석사눈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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